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695
한자 光山 金氏
이칭/별칭 광산 김씨 판서판도공파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문광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327년 - 김성우 출생
입향 시기/일시 고려 후기 - 김성우 입향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392년 - 김성우 사망
묘소|세장지 김성우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발산지도보기
성씨 시조 김흥광(金興光)
입향 시조 김성우(金成雨)

[정의]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하고 김성우(金成雨)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보령의 이거 성씨.

[개설]

광산 김씨(光山 金氏)는 광주 김씨(光州 金氏)로 불리기도 하였지만, 이후 광산 김씨로 통일되었다. 광산은 오늘날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해당한다.

[연원]

광산 김씨의 시조 김흥광(金興光)[?~737]은 신라의 왕자였는데, 신라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의 셋째 아들이다.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을 예견하고 무진주 서일동[현재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으로 피하여 학문을 닦으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고려 태조가 사성(賜姓)[임금이 공신에게 성(姓)을 내려 줌]을 하면서 김흥광을 시조로 하고, 광산을 본관으로 하였다. 고려 후기 때 보령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고 청라동에 김성우(金成雨)[1327-1392]가 입향하면서 성장하였다.

[입향 경위]

전라도 도만호(都萬戶)였던 김성우가 전라도에서 충청도 보령 해안으로 올라오는 왜구를 보령 연안과 청라동 의평리 등지에서 물리친 후, 보령 땅을 사패지(賜牌地)[고려·조선 시대에, 임금이 내려 준 논밭]로 받아 고만·청라·발산 등지에 전장(田莊)[개인이 소유하는 논밭]을 마련하면서 보령에 입향하게 되었다.

[현황]

2015년 본관 인구 분포 조사에 따르면, 충청남도 보령시에 거주하는 광산 김씨는 2,124명으로 파악된다.

[관련 유적]

김성우 묘소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나원리 발산에 있다. 매년 11월 1일 대천문화원[지금의 보령문화원] 주관하에 김성우의 추모 제향이 거행되고 있다. 김성우의 첫째 아들 김남호(金南浩)[1360~1424]의 묘와 비는 충청남도 보령시 죽정동에 있으며, 김극성(金克成)[1474-1540]과 김인사(金麟士)의 묘소는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능동에 있는데, 김극성의 사당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김해수의 묘와 비는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옥계리에 있으며, 김계환(金啓煥)[1729~1789]의 정려(旌閭)[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붉은 문을 세워 표창하던 일]는 6대 손자며느리 백천 조씨의 정려와 함께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 새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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