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고성욱(高成郁)[1621~1691]은 천안군 군남면[현 천안시 청룡동 지역의 조동산(鳥洞山)으로서 천안 삼거리 고속 도로 휴게소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출신으로 몸소 20년 동안 농사를 지어 부모를 봉양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자신은 기운 곳이 100군데도 넘는 누더기를 입고 얼굴에는 굶주린 기색이 역력했지만, 부모에게는 가볍고 따뜻한 옷을...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자는 의숙(宜叔)이며, 정로위(定虜衛)를 지낸 곽영남(郭英男)의 아들이다. 곽의(郭義)[1562~?]는 효성이 깊어서 부모를 섬기는 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스스로 음식을 장만하여 부모 봉양하는 일을 직분으로 여겼다. 어릴 때부터 새로운 것을 얻으면 품에 지니고 돌아와서 부모에게 드렸으며, 항상 망태기와 통발과 오구를 들고 앞 냇가에서 물고기...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면적이 231만 2422㎡로 목천읍에서 열네 번째 넓은 지역이다. 목천읍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7㎞ 지점에 위치하며, 국도 21호선에서는 북쪽으로 약 2㎞ 거리에 있다. 천덕선이 마을 앞으로 지나간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병합된 마을 중 교항리의 ‘교’ 자와 승천리의 ‘천’ 자를 따 교천리라 하였다. 1914...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촌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목천군 읍내면 용연리, 후평리, 신기리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교촌리로 합병되어 목천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천안읍이 천안시가 되면서 천원군 목천면 교촌리가 되었으며, 이후 본 마을 이름 찾기 일환으로 199...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성희(聖希)이다. 여진족을 정벌한 김응상(金應祥)의 6세손이고, 참봉(參奉)을 지낸 김광석(金光錫)의 아들이다. 김경연(金景淵)[1704~1767]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고 곁에서 모실 때는 정성을 다하였다. 음식은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고, 옷은 필히 먼저 입어보고 편한지를 살폈다. 1747년에 어머...
-
조선 시대 천안 지역의 효자. 김담(金澹)의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전의(全義)에서 직산으로 이사해 왔는데, 사람됨이 순박하고 꾸밈이 없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죽은 뒤에 홀로 남은 아버지를 정성을 다해 극진히 섬겼다. 집이 몹시 가난하였지만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힘써 농사를 지어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장마로 인해 생활이 몹시 어려울 때에도 아버지의 밥상에는 맛있는 음...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이자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사장(士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일우(金一宇), 할아버지는 김수경(金壽慶)이다. 아버지는 선전관을 지낸 김성구(金聖耈), 어머니는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김도혁(金道赫)[1713~1784]은 열여섯 살 되던 해에 선전관으로 있던 아버지가 남의 허물을 원통하게 뒤집어쓰고 멀리 유배되자, 고생하시는 아버...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중화(中和), 자는 찬숙(贊叔)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김진성(金振聲), 증조할아버지는 호조 좌랑을 지낸 김익(金釴), 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김중정(金重鼎)이다. 아버지는 김한명(金漢鳴)이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晋州姜氏)이다. 아들은 김홍제(金弘濟), 손자는 김치삼(金致三)이다. 김수필(金...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김인립(金仁立)[1627~?]은 천안의 소동면[현 풍세면 일부 지역] 출신으로, 천성이 지극한 효자여서 힘써 농사지어 부모를 봉양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하루도 정성 어린 음식을 거르지 않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 말고도 하룻밤에 두세 번씩 일어나서 부모의 안부를 살폈다. 1654년(효종 5) 정월에 어머니가 병이 들어 매우...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김지(金砥)의 아들이다. 김인석(金仁碩)[1735~1773]은 아버지가 병이 들자 눈 오는 밤에 목욕재계하고 홀로 만뢰산(萬雷山) 기슭으로 가서 하늘에 치성(致誠)을 드렸는데, 제사가 끝나자 호랑이가 두 마리가 집까지 호위하였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날에는 한 떼의 까마귀가 상여를 따라가서 장례를 마치자 흩...
-
조선 시대 천안 출신 의 효자. 본관은 진도(珍島), 자는 여형(汝亨)이다. 호부 시랑을 지낸 김혁여(金奕輿)의 11대손이다. 『국역 직산현지』에 따르면 김중태(金重泰)는 직산군 이남면 정자리[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정촌리]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여 봉양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병들었을 때 대변을 맛봐 상태를 살폈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예전에는 목천군의 서면 지역이었으며, 현재는 목천읍 관할이며 독립 기념관이 있다. 1914년에 행정 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북동과 남동이 병합하여 남화리라 하였다. 옛날에는 목천의 남쪽의 벌판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남벌이라 했다. 목천군 읍내면 지역으로, 1914년에 행정 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남화리로 개설되어...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덕회산(德會山) 밑에 좋은 밭이 있다고 하여 덕전리(德田里)라 하였다. 1914년 이전에는 충청도 목천군 읍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신흥리, 유왕동, 점말, 중리, 장흥동, 용소말, 심평 마점를 병합하여 덕전리라 하고, 목천면의 관할에 두었다. 신흥동은 폐동되어 없어...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병합된 마을 중 도전리의 ‘도’ 자와 장평리의 ‘장’ 자를 따서 도장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충청도 목천군 서면 지역으로 관동, 진지리, 신기리, 장평리, 도전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장리라 하고 목천면에 편입하였다. 1963년 천안읍이 천안시가 되면서 천원군 목천면...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석오 이동녕이 출생하였고, 위당 정인보가 잠시 기거하면서 공부를 하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전설에 배의 형국이라서 이곳에 이사를 와 부자가 되면 떠나야 한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풍수 비보 사상에서 배에 돛대가 필요로 해서 동네 가운데에 돛에 해당하는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은행나무가 이동녕의 생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병합한 마을 중 동리의 ‘동’ 자와 장군평의 ‘평’ 자를 따 동평리라고 하였다. 목천군 읍내면의 장군평, 샘모랭이, 중모리, 동리의 일부를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병합하여 동평리라 하고, 목천면에 편입하였다. 1963년 천안읍이 천안시가 되면서 천원군 목천면 동평리가...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에 속한 법정읍. 목천은 군(郡)으로서 오랜 역사를 전개해오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폐군되어 면명(面名)이 된 것이다. 따라서 목천의 지명 유래는 고을 이름에서 찾아야 한다. 1968년에 목천 향교 전 전교 김붕수에 의해 증보 편찬된 『대록지(大麓誌)』 서문에 목천의 지명 유래가 명시되어 있다. “육면(六面)의 물이 다섯 내...
-
조선 후기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 출신의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성야(聖野)이다. 우찬성 지애(芝厓) 민형남(閔馨男)의 7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승지 민계(閔堦)이다. 아버지는 민사정(閔師貞), 어머니는 승지 정택하(鄭宅河)의 딸이다. 민기세(閔箕世)[1767~1810]는 1767년(영조 47) 직산현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가 노령에 낳아 젖이 부족하였다...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밀양(密陽). 박춘흥(朴春興)의 아들이다. 박인길(朴仁吉)[?~?]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대추 하나, 배 한 개라도 품에 넣었다가 반드시 부모에게 갖다 드렸다. 7월에 병들어 앓던 어머니가 갑자기 죽어 시신을 염하여 관에 옮긴 뒤였는데. 박인길은 칼로 손가락 끝을 짼 다음 목침으로 연달아 짓찧어서 피가 방울방울 떨어지게 하여...
-
조선 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하음(河陰)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봉공윤(奉公胤), 증조할아버지는 봉군필(奉君弼), 할아버지는 봉천우(奉天祐)이다.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봉문(奉文)이며, 어머니는 덕양군(德陽君) 기원(奇轅)의 딸 행주 기씨(幸州奇氏)이다. 봉유지(奉由智)[?~?]는 둘째 형인 봉유례(奉由禮)가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나 태종 때 이조 판서...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병합된 마을 중 삼층리의 ‘삼’ 자와 신성리의 ‘성’ 자를 따서 삼성리라 하였다. 1914년 이전에는 목천군 서면 지역으로 삼층리, 도리티리, 신성리, 산곡리 일부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삼성리로 병합되어 목천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천안읍이 천안시가 되면서 천원군 목천면...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목천군 읍내면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리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때 목천군 읍내면 서지리, 서당리, 중보리 일부를 병합하여 서리라 하고, 천안군 목천면에 편입하였다. 1963년 천안읍이 천안시가 되면서 천원군 목천면 서리가 되었으며, 이후 본 마을 이름 찾기 일환으로 199...
-
조선 전기 천안 출신의 효자. 서만(徐萬)은 목천군 북면 사담리[현 천안시 동남구 북면 사담리] 출신이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 효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삭망[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에는 술과 음식을 갖추어 봉양하였다.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으나 평생을 한결같이 이행하였다. 부모가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천리 길을 가서라도 구해다 드렸다고 한다. 서만의 효...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경직(敬直)이다. 적순부위(迪順副尉) 서혼(徐混)의 아들이며, 효자 서충필(徐忠弼)의 동생이다. 서충좌(徐忠佐)는 아이 때부터 성품이 순정(純正)하여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열두 살에 할머니 상을 당하여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아버지를 따라 시묘하면서 교대로 제사를 받들었고 탈상한 뒤에도 게으름이 없었다. 1571...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언직(彦直)이다. 적순부위(迪順副尉) 서혼(徐混)의 아들이며, 효자 서충좌(徐忠佐)의 형이다. 서충필(徐忠弼)은 타고난 자질이 순후(醇厚)하고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아버지가 병에 걸려 자리에 눕자 여러 해 동안 동생 서충좌와 함께 봉양하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병이 위독해지자 변의 맛을 보고 상태...
-
조선 후기 충청남도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남양, 자는 우천(于天)이다. 효자 정려를 세운 서충필(徐忠弼)과 서충좌(徐忠佐)가 종조할아버지이다. 장령공(掌令公) 서정연(徐挺然)의 아들이다. 서한장(徐漢章)[1640~1677]은 천안 원일면[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매당리]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겨우 7세 되었을 때 절구시를 지었다. 1...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동쪽은 산이고 서쪽은 들이므로 서쪽으로 마을이 발전해야 흥한다고 하여 서흥리라 하였다 한다.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 서흥리는 목천군 읍내면 일덕지리·이덕지리·와룡리·상림리·동막리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병합되어 이루어진 마을로, 목천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천안...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냇물이 돌 사이로 맑게 흘러내려 간다고 하여 석천(石川)이라 하였다 한다. 목천군 읍내면 사기점리, 먹방이, 산방리 일부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석천리로 병합되어, 목천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천안읍이 천안시가 되면서 천원군 목천면 석천리가 되었으며, 이후 본 마을...
-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읍에 속한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목천군 서면 소사리의 지명을 따서 소사리라고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목천군 서면 소사리, 신곡리 일부, 도전리 일부, 천안군 소동면 소시리, 연기군 전의면 역리 일부를 병합하여 소사리라 하고, 목천읍에 편입하였다. 1963년 천안읍이 천안시가 되면서 천원군 목천면 소사리가 되었으며,...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송윤재(宋潤載)과 송지대(宋持大)의 본관은 여산(礪山). 정민공(貞愍公) 송현수(宋玹壽)의 후손이며, 송지대가 송윤재의 맏아들이다. 송윤재는 효성이 지극하여 효동으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학질에 걸려 병세가 위독하자 대변을 맛봐 병세를 살폈으며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매일 사당에 절을 하며 어머니의 쾌유를 빌어 옷은 무...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소나무가 많아 송전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예전의 목천군 읍내면 신대리, 서덕리, 만일동, 산방리 장성거리 등이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송전리로 병합되어 목천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천안읍이 천안시가 되면서 천원군 목천면 송전리가 되었으며, 이후 본 마을 이름 찾기 일환으로...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목천읍 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약 3.1㎞ 지점에 위치한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병합된 마을 중 신흥리의 ‘신’ 자와 농계리의 ‘계’ 자를 따서 신계리라고 하였다. 목천군 서면 신흥리, 농계리, 주막거리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계리로 통합되어 목천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윤보(允輔)이다. 양도공 안경공(安景恭)의 후손이다 안종필(安宗弼)은 이동면 시랑리[현 천안시 입장면 시장리]에 살았다. 그는 학문이 깊지 않았으나 천성이 효심으로 가득하여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아버지가 병으로 3년간 고통을 받았는데,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하며 의원에게 묻고 약을 구하는 등 간호에...
-
고려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천안(天安). 영릉직(英陵直)을 지낸 양구화(梁九和)의 아들이다. 『영성지(寧城誌)』에 의하면 양호(梁好)는 젊어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4품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직(辭職)하고 귀향하여 부모를 봉양하였다. 부모가 질병에 걸리자 대변을 맛봐 병세를 살폈으며,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삼 년 동안 시묘 살이를 하였다. 아버지가 일찍이 막내...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오막생(吳邈生)의 아들이 오계학(吳桂鶴)이다. 오막생(吳莫生)은 천안시 직산읍 마정리 미륵산(彌勒山) 부근에 살았다. 그는 학문을 배우지 못하였으나 천성이 순하여 부모를 잘 섬겼으며, 힘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아버지가 일찍이 병석에 눕자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아버지의 속옷을 손수 빨아 항시 청결하게 모셨다. 추운 겨울에도...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오시혁(吳始赫)과 오태현(吳台鉉)의 본관은 용안(龍安). 오시혁은 군수를 지낸 오형(吳亨)의 14세손이며, 오태현은 그의 아들이다. 오시혁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순장(巡將)을 행직(行職)하였으며, 부모에게 지극한 효도를 다하였고 동기간에는 우애가 깊었다. 자수성가(自手成家)하여 모은 재산을 여러 동생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고...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병합된 운파산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목천군 읍내면 의식동, 북면의 역촌 일부, 운파, 뱅골이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운전리로 병합되어 목천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천안읍이 천안시가 되면서 천원군 목천면 운전리가 되었으며, 이후 본 마을 이름 찾기 일환으로 199...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원주(原州). 천안 군수를 지낸 원궤(元簋)의 5세손이다 원장(元墻)[?~?]은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처럼 부모를 흠모하였고 부모의 뜻을 받들었다. 그리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아침저녁으로 죽순과 잉어를 구해 부모를 봉양하였다. 원장의 효성에 감복한 마을 사람들이 관아(官衙)에 알렸고, 주변 유생들이 서장(書狀)을 올려서 귀감으로 삼았다...
-
조선 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영중(榮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공조 정랑을 지낸 유백순(兪伯純), 할아버지는 의금부 도사를 지낸 유보정(兪輔鼎)이다. 아버지는 효자 유언겸(兪彦謙)이다. 유경인(兪敬仁)[1525~?]은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으며, 한결같이 아버지 유언겸의 효성을 법도로 삼았다. 가난하였지만 부모에게 술과 고기를 갖추어...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현백(顯伯)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의금부 도사를 지낸 유보정(兪輔鼎), 할아버지는 유언겸(兪彦謙), 아버지는 유경인(兪敬仁)이다. 유명립(兪名立)[1572~1661]은 집안 대대로 천안에 살아왔다. 그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집안의 전통을 이었으며,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정성을 다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피를 토...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문화(文化). 문성군(文城君) 유수(柳洙)의 후손이고, 참봉(參奉) 유구년(柳龜年)의 고손자이다. 유석문(柳錫文)은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해 부모보다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었으며,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 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며 예법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스무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삼 년 동안 무덤의...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유언(柳堰)[1714~?]은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하뜸 또는 하금곡 하쇠골이라 부르는 곳에 살았다. 어머니 정씨(丁氏)는 고질병을 앓고 있었는데, 유언은 어린 나이에도 춥고 더운 때를 가리지 않고 나물을 캐고 고기를 잡아서 맛있는 음식을 공양하였다. 어느 날 유언이 산에 있을 적에 갑자기 마음이 움찔하고 식은땀이 나서 황급히...
-
조선 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겸지(謙之)이다. 할아버지는 공조 정랑을 지낸 유백순(兪伯純)이고, 아버지는 의금부 도사를 지낸 유보정(兪輔鼎), 어머니는 이구린(李龜鱗)의 딸이다. 유언겸(兪彦謙)[1496~1558]은 풍세면 남관리에서 태어났으며, 효행으로 1540년(중종 35)에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다가 1543년(중종 38)에...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고흥(高興).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된 유의신(柳義臣)의 아들이다 유연(柳淵)의 아버지 유의신은 임진왜란 때 한산도(閑山島)의 진중에서 왜적과의 전투 중에 숨을 거두었다. 이때 휘하 장병들의 동요를 염려하여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 것을 당부하며 유연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지휘권을 넘겨받은 유연은 아버지의 소임을 대신하여 적...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창원(昌原). 참판에 증직된 유후양(兪後陽)의 고손자이다. 유위선(兪緯善)은 집안이 지극히 빈곤하였으나 부모 봉양에는 소홀한 것이 없었으며, 부인 안씨(安氏)와 함께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였다. 유위선의 효행과 관련해서는 집에서 기르는 개가 꿩을 물어와 효행을 도왔다는 일화가 전한다. 어사(御使)가 유위선의 효행을 아름답게 여겨...
-
조서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창원(昌原). 효자 유언겸(兪彦謙)의 증손자이다. 효자 유응채(兪應采)가 아들이다. 유후양(兪後揚)[?~?]은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지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사람의 도리를 대략 식별할 정도로 자랐을 때 다른 아이들이 “아버지!”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아버지를 찾으며 소리쳐 울부짖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해평(海平), 호는 신덕재(新德齋)이다. 윤두수(尹斗壽)의 7대손이며,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윤세겸(尹世謙)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는 윤발(尹潑)이고, 아버지는 윤득실(尹得實)이다. 윤취동(尹取東)[1798~1863]은 어릴 때부터 손수 나무를 하고 불을 때며 효성으로 부모를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자신의 손가락...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때 병합한 응곡리의 ‘응’ 자와 원동리의 ‘원’ 자를 따서 응원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목천군 서면 응곡리와 원동리를 병합하여 응원리라 하고 목천면에 편입하였다. 1963년 천안읍이 천안시가 되면서 천원군 목천면 응원리가 되었으며, 이후 본 마을 이름 찾기 일환으로 1...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이귀웅(李貴雄)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천안시 목천 출신이다. 이귀웅은 아버지가 병이 들자 종기를 입으로 빨아 낫게 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이 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려 깨어나게 하였다. 1729년(영조 5) 부사과(副司果)에 추증하고 정려를 내렸다. 천안시 병천면 봉항리에 이귀웅 정려각이 남아 있다....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의원(義元)이다. 월천부원군(月川府院君) 이정암(李廷馣)의 10대손이며, 부인은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다. 이광춘(李光春)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규호(李圭祜)[1752~?]는 효심이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밤을 새워 손수 약시중을 들며 정성을 다해 간병하였으나...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성(安城). 기묘사화의 명현인 이덕함(李德涵)의 후손이며, 이도동(李道東)이 이인양(李仁養)의 아버지다. 이도동은 어머니가 병이 들자 두 번이나 손가락을 베어피를 마시게 하여 병을 낫게 하였다. 아버지가 부스럼 병을 앓을 때 고름이 터져 흘러나와도 꺼리지 않고 정성스레 간병하였으며, 자라와 잉어를 잡아 봉양하였다. 아무리 추운 엄동...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아버지는 진사 이억(李億)이며, 아들은 이홍기(李弘基)이다. 이병(李昞)[1626~1670]은 천안 원서면[현 풍세면 일부 지역]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행실이 돈독하여 부모를 효도로 섬겼다. 이병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6년 동안 시묘를 살면서 애통해 했다. 당시에 신묘한 샘물이 솟고 기르던 개가 꿩을 잡아 와서 공양하는 등 이상...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의병장. 본관은 수안(遂安), 자는 중수(仲綏), 호는 송담(松潭) 또는 일운 거사(一雲居士)이다. 참판을 지낸 이영견(李永肩)의 고손자이고, 승지 이익령(李益齡)의 증손자이다. 할아버지는 사도시 직장을 지낸 이생은, 아버지는 양양 도호부사를 지낸 이주국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동생인 이인장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효자 이덕운(李德運)이 아들이고, 이광춘(李光春)이 손자이다. 이순학(李順鶴)은 부모에게 음식을 봉양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려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이순학의 아버지는 조청을 가장 즐겼는데, 집이 가난하여 계속 해 드리기가 어려웠다. 그때 마침 한 떼의...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완산(完山), 호는 후계(後溪)이다. 분곡(盆谷) 이승벽(李承壁)의 5세손이다. 이정항(李挺恒)은 환갑의 나이에도 부모의 묘소를 찾아 지극한 예를 다하였다. 묘소에서 절을 많이 하여 절할 때 무릎이 닿은 곳의 잔디가 없어지고 땅이 움푹 패었고, 성묘하며 쏟아 내린 눈물로 백양나무가 저절로 말라 죽었다는 일화가 전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전시오(全時五)[?~?]는 아버지가 죽자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검소하게 살며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이 명주옷을 장만하여 입기를 권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몸에 걸치지 않았다. 임종할 때 자손들에게 “화목에 힘써 효성을 이루고 진실로 항상 조심하며 이를 외우라.”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자손들이...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온양(溫陽).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정광원(鄭光元)의 손자이며, 정태항(鄭泰恒)의 증손자이다. 정간시(鄭簡始)[?~?]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들었을 때 약탕기 옆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 추운 겨울에 굼벵이와 뱀 같은 것으로 양약(良藥)을 만들어 부모의 병을 치료하였고, 여름에는 정자에 모시고 부채질을 하여 사람들이 모두 효...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아버지는 정일남(鄭日南)이다. 정계인(鄭戒仁)은 지금의 천안시 용곡동의 두텃골 출신으로 조선 숙종 때 사람이라 전한다. 평소에도 효행이 지극했다 하며 동리에서도 정계인의 선행에 칭찬이 자자했다. 정계인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는데, 1682년 4월 24일 밤에 불한당들이 몰려와 가재를 약탈하고 칼을 뽑아 아버지 정...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진보(眞寶). 고려 말의 충신 조용(趙庸)의 7세손이다. 조진형(趙震亨)이 아들이다. 조립(趙砬)[1584~?]은 어려서부터 출중하였고, 할머니와 어머니를 섬기면서 의복을 손수 손질하여 봉양하였다. 36세 되던 해에 할머니가 죽자 통곡하며 슬퍼함이 하늘에 닿을 정도였고, 53세 되던 해인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마을이 피폐해지...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주선종(周善宗)은 열 살이 채 안 되어 어머니를 여의고 애달프게 울며 아버지를 위로하고 감싸서 주위 사람을 감동시켰다. 주선종은 관노비였던 까닭에 쉴 틈도 없이 밤낮으로 분주하였으나, 아버지를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살피고 의복과 음식을 올리는 일을 빠뜨린 적이 없었다. 1678년 3월 아버지가 병들어 거의 죽게 되자 정성을 다하여 약을...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당시 변합된 마을 중 양지말의 ‘지’ 자와 상남산·하남산의 ‘산’ 자를 따 지산리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목천군 서면 상남산리, 하남산리, 양지리를 병합하여 지산리를 개설하고 목천면에 편입하였다. 1963년 천안읍이 천안시가 되면서 천원군 목천면 지산리가 되었으며, 이후...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서(聖瑞)이다. 운암(雲庵) 차원부(車原頫)의 16대손이자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의 9대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차우적(車禹跡), 증조할아버지는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을 지낸 차경로(車景路), 할아버지는 통정대부 차득방(車得芳)이다. 아버지는 절충장군 차정당(車正堂)이다. 차지린(車趾麟)은 타고난 효자로서...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평강(平康), 호는 존심재(存心齋)이다. 보덕(輔德)을 지낸 채응복(蔡膺福)의 증손자이고, 채계하(蔡啓夏)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채홍혁(蔡弘赫)이다. 외할아버지는 한성일(韓聖一)이고, 정언(正言)을 지낸 채정영(蔡定永)이 그의 형이다. 채주영(蔡冑永)은 스스로 농사를 지어 부모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차려 극진히 봉양하였고, 늙어서도 독...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에 속하는 법정리. 『천안의 땅 이름 이야기』[1999]에 의하면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통합된 한천리의 ‘천’ 자와 괴정리의 ‘정’ 자를 따 천정리라 하였다. 목천군 서면 한천리와 괴정리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천정리로 병합되어 목천면에 편입되었다. 1963년 천안읍이 천안시가 되면서 천원군 목천...
-
조선 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인보(仁甫)이다. 효자 최돈(崔墩)의 맏아들이다. 최극인(崔極認)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 넣어 아버지의 병을 낫게하기도 했다. 어느 해 몹시 추운 겨울 어머니가 병환 중에 수박을 먹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최극인은 사방에 구하여 보았지만 수박을 구하...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효자 최엽(崔熀)의 증손자이다. 최달철(崔達喆)[?~?]은 직산군 삼동리 가좌동[현 천안시 입장면 가산리 일원]에 살았다. 어려서부터 비범하여 먹을 것을 얻으면 반드시 부모에게 바치는 등 부모 공경의 도를 행하였다고 한다. 여덟 살 되던 해에 병든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개를 앞세우고 산으로 가서 개에게...
-
조선 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고(仲高)이다. 태조 때의 원종공신(元從功臣) 최유경(崔有慶)의 8세손이며, 효자 최사립(崔斯立)의 손자이다. 최돈(崔墩)[?~?]은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으며, 어머니가 병이 들어 위중하자 동생인 최기와 함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해서 3일을 더 살게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막을 짓고 시묘를...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천경(天擎)이다. 효자 최극해(崔克諧)의 둘째 아들이며, 최기(崔基)의 아들인 당숙 최극충(崔克忠)의 양자로 입적되어 대를 이었다. 최주민(崔柱旻)[?~?]은 천성적으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머니가 종창을 앓게 되자 입으로 종기의 고름을 빨아내며 간병하였다. 또, 어머니가 한겨울에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현상후(玄尙後)는 아버지가 풍(風)으로 인해 갑자기 의식을 잃고 경련이 이는 병을 앓았는데 몇 해가 지나 고질병이 되자, 효성을 다해 약을 구해 바쳤고 자신이 아버지 병을 대신 앓게 해 달라고 천지신명에게 기도하였다. 어느 날 병이 위독하여 거의 구원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는데, 칼로 손가락을 잘라 아버지 입에 피를 흘려 넣어 소생케 하였...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연주(延州). 효자 현상후(玄尙後)의 서족(庶族)이라는 기록이 전할뿐이다 현유선(玄有先)[?~?]은 천안의 관노로, 바쁜 와중에도 아침저녁으로 부모에게 문안 올리는 일을 빠뜨리지 않았다. 비록 가난하여 자신은 먹지 못하더라도 부모의 음식 봉양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으며,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했다고 전한다....
-
조선 후기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성주(星州). 고조할아버지는 보공 장군(保功將軍) 현윤무(玄允武), 증조할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낸 현숙(玄璹), 할아버지는 장흥 판관을 지낸 현덕승(玄德升)이다.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아버지 현언(玄偃)과 어머니인 유영우(柳榮遇)의 딸 진주 유씨(晋州柳氏) 사이의 5남 2녀 증 4남이다. 부인에 대한 기록은 없고,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둘...
-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효자. 본관은 남양(南陽). 남양군(南陽君) 홍주(洪澍)의 후손이다. 홍천섭(洪天燮)[?~?]은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자 다듬이 방망이를 가지고 자신의 손가락을 찧어 생피를 흘려 넣어 3일을 더 살게 하였다. 어사가 지극한 효행이 천성에서 우러났다는 서계(書啓)를 조정에 올렸으며, 유생들이 포상을 바라는 글을 지어 올렸으나 정표를 받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