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가춘리 주동마을에 있는 조선 중기 태실비. 가춘리 주동 태실비는 1983년 4월에 발견되었는데, 비문과 『태봉등록(胎封謄錄)』, 『선원계보(璿源系譜)』를 통해 비의 주인공이 인조의 후궁인 조귀인(趙貴人) 소생의 1남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과 2남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임이 밝혀졌다. 1643년 숭선군을 장태(藏胎)하고 1645...
-
고대 남북국시대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우두(牛頭) 혹은 자두(字頭). 석탈해왕(昔脫解王)의 18세손으로 아버지는 육두품 11관등 내마(柰麻) 석체(昔諦)이다. 강수의 조상은 경상남도 고령의 대가야 출신으로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귀화한 것으로 보인다. 강수는 중원경(현 충주시) 출신으로 어머니가 꿈에 머리에 뿔이 난 사람을 보고 임...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충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중기 무신 이수일의 실기. 이수일(李守一)[1554~1632]의 연보(年譜)·시(詩)·서(書)·시장(諡狀)·비명(碑銘) 등 이수일에 대한 사적을 모은 책이다. 1898년(고종 35) 이수일의 10대손 이문흠(李文欽)이 연보를 작성하고 공사문적을 수집하여 편찬하였다. 크기는 가로 20.4㎝, 세로...
-
삼한시대 충청북도 충주시 교현동 지역의 옛 이름으로 추정되고 있는 지역. 충주시 교현동에 속하며, 북문이 있었던 곳은 충주여자중학교의 북쪽 사거리 주변으로 추정되며, 그 북쪽으로 공설운동장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다. 『예성춘추(蘂城春秋)』 41쪽의 「고북문」조에, “읍북 주봉 동측가도를 고래로부터 고북문거리라고 하는데, 연대는 미상이나 전설에 의하면 삼...
-
통일신라시대 때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서예가. 711년(성덕왕 10)에 태어난 김생(金生)은 안동의 문필산, 경주의 경일봉 석굴, 봉화 청량산 김생굴, 음성군 원통산 기슭의 김생암 등에서 글씨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충주 북진의 언덕에 김생사(金生寺)가 있었는데 김생이 두타행(頭陀行: 승려의 수련)을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를 미루어볼 때 김생은 말년에 충주에...
-
통일신라시대 중원경 대윤을 역임한 종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위흔(魏昕). 신라 태종무열왕의 9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이찬을 지낸 김주원(金周元), 할아버지는 소판을 지낸 김종기(金宗基), 아버지는 파진찬을 지낸 김정여(金貞茹)이다. 김양(金陽)은 836년(흥덕 3) 고성태수를 거쳐 중원경(현 충주)의 대윤(大尹)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펼쳤다. 이후 무주(현 광주)...
-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전통 민속주인 청명주 기능보유자. 김영기는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에서 태어났다. 『향전록(鄕傳錄)』에 나오는 청명주(淸明酒) 제조기법과 조모와 숙모로부터 전수받은 비법에 따라, 남한강과 달천 및 창골에서 흘러오는 세 물이 합수되는 수살매기에서 채수한 물로 빚어 청명일에 마신다는 청명주를 개발하였다. 서울보건전문대학 노완...
-
1256년(고종 43) 4월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덕주산성에서 충주민과 몽고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고려와 몽고가 처음 접촉한 것은 1219년(고종 6)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을 평정할 때 몽고의 후원을 얻어 공동 작전을 취했을 때이다. 이 일을 빌미로 이후 몽고는 고려에 대한 은인을 자처하며 사신을 보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1225년(고종...
-
고려 후기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했던 승려. 본관은 풍양(豊壤). 속명은 조혼수(趙混脩), 자는 무작(無作), 호는 환암(幻菴), 탑호는 정혜원융(定慧圓融). 풍양조씨 전직공파 조지란(趙之蘭)의 6세손으로 아버지는 조숙령(趙叔鴒), 어머니는 청주경씨이다. 보각국사는 1320년(충숙왕 7) 3월 13일 아버지 조숙령의 임지인 용주(현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났다....
-
충청북도 충주시에 있는 사찰의 유지(遺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충주 지역에 있던 사찰은 『고려사(高麗史)』·『세종실록(世宗實錄)』·『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각종 지리지에 그 사찰 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없어지고 절터만이 남아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절터가 있으며 그곳에서 나오는 명문의 와편을 통하여...
-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불교 신자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 충주 지역의 사찰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숭선사·죽장사·대원사·개천사, 『세종실록』에 청룡사·김생사·용두사·엄정사·향림사,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련사가 보인다. 이후『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종 지리지에도 사찰명이 기록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사찰이 있었던 것은 오늘에 전하는 수많은 절터로 알 수 있다....
-
충청북도 충주시 목행동에 있던 세기항공 산하 충주 지사. 충주시와 서울특별시 간의 교통 편의를 위하여 경비행기를 운행하는 여객 사업을 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67년 기차나 버스를 이용한 충주시와 서울특별시의 소요 시간이 4~5시간 걸리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개설하였다. 1968년 여름부터 목행동에 있었던 간이 활주로를 이용하여 운행하였으나, 3년여를...
-
임진왜란 중 충주는 가장 희생이 많았던 싸움터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신립 장군은 탄금대 앞에서 달천과 남한강을 뒤로 하여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8,000여 명의 조선군 중 두서너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할 만큼 희생이 큰 전투였다. 또한 충주읍성에 있던 많은 사람들, 즉 사민(士民)과 관속(官屬)들이 당대의 명장인 신립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음을 믿고 피난을...
-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택견 기능보유자. 신한승은 13세 때부터 종조부 신재영(辛在榮)으로부터 택견을 배웠다.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충주로 이주하여 송덕기(宋德基)와 함께 서로의 기능을 보완하면서 택견을 정리하여 체계화하였다. 생활고(生活苦)에 시달리면서도 택견의 계승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으며, 1973년 충주에 택견도장을 설...
-
고려와 조선시대에 충청북도 충주 탄금대가 있던 지역의 이름. 양진명소는 탄금대 북쪽 강가에 임한 금휴포구에 있었다. 한때는 신립 장군의 사당이라고도 하였으며 고려시대부터 봄·가을로 나라에서 향을 내리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의 제신(祭神)인 오룡(五龍)에게 제사하던 별신굿놀이로 ‘양진명소 오룡굿’이 전해지고 있다. 근년에 이 오룡굿을 문화제 행사에서...
-
고려와 조선시대에 충청북도 충주 탄금대가 있던 지역의 이름.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 북쪽 강가에 임한 금휴포구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고려시대부터 봄·가을로 지방관에 명하여 제사를 지냈다. 양진명소(楊津溟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탄금대 금휴포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 충주목조에 “춘추로 소재관에 명하여 제사를 지냈다(楊津衍所...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충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중기 안명로가 편찬한 병서. 안명로(安命老)[1620~?]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50년(효종 1) 문과에 급제하였다. 양산군수·서천군수·장연부사·안동부사·봉상시정 등을 역임하였고,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변방에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1660년(현종 1) 진법(陣法)의...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온천리에 있는 조선 후기 「동규절목」을 돌에 새긴 비석. 1892년(고종 29) 11월에 작성한 고사리면 온정동(溫井洞)[현 수안보면 온천리]의 「동규절목」 원본(21×28㎝) 8면을 이어서 확대하여 돌에 새긴 비석이다. 절목서(節目序)와 9조의 절목으로 되어 있다. 도덕성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온천리개발위원회가 ‘자랑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했던 의병장.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백기(白旗). 개국공신 조인옥(趙仁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된 조일(趙逸)이다. 충주 출신의 조웅은 1591년(선조 24) 조헌(趙憲)의 천거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얼마 후 사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강(趙綱)을 따라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나...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충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중기 의병장 조웅이 받은 공신녹권. 임진왜란 때 충주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의 북상을 저지하다가 순절한 조웅(趙熊) 장군에게 1605년(선조 38)에 내려진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이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때 충절로 이름이 있던 선무(宣武)·호종공신(扈從功臣) 등 9,000명의 이름이 등재...
-
1956년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됨에 따라 1995년까지 읍의 외곽 지역 12개 면을 관할했던 행정구역. 중원군의 인구는 충주시와 분리된 1년 후인 1957년 12월 현재 113,114명이었으며, 1966년에는 153,487명으로 충청북도 내에서도 으뜸가는 거대한 군이었다. 그러나 1993년 말 현재는 주민등록상 18,951가구에 67,749명(남 34,531, 여 33...
-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한 「중원마수리농요」 기능보유자. 지남기는 1926년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웅동리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면 신양리로 이주하였으며, 28세에 다시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농사철에 뛰어난 목청으로 메김소리를 맡아 하다가 주위에 알려지면서 1970년대 당국의 지원을 받아 농요 복원에...
-
충청북도 충주시 직동에 있는 고려 전기 무덤군.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모두 도굴되고 심하게 파괴된 것을 정리하기 위한 조사를 하였다. 할석으로 축조한 구덩식 돌덧널무덤이며, 내부에서 관정(棺釘)이 나오고 있어 돌덧널 안에 따로 목관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산에서 서남으로 뻗어내린 짧은 두(A. B) 능선에 15기(A지구 9기, B지구 6기)의 고묘들...
-
진흥왕은 재위 12년째를 맞은 551년에 나라를 새롭게 열겠다는 의지로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친다. 개국의 의지를 실천하여 신라의 중흥을 이룩한 진흥왕의 일대 사업은 국경 지대의 요충인 낭성(娘城) 순수에서 우륵의 신가(하림조)를 접한 이후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진흥왕과 우륵(于勒)의 만남에는 어떠한 수수께끼가 있음이 분명하다. 다음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
-
신라시대 충주최씨 시조. 본관은 충주(忠州). 초명은 최우(崔偶). 충주최씨의 시조이다. 최승(崔陞)은 당나라 출신이다. 846년 당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도적이 들끓자 병마사에 임명되어 도적을 토벌하였다. 이후 당나라에서 검교태부, 시중청주자사, 평노군절도관찰사, 압신라발해양번등사를 역임했고, 태자소사박능군개국후에 봉해져 식읍 천호(千戶)를 받았다. 889년(진성여왕...
-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경종의 태실. 경종대왕 태실비에 의하면 경종이 1688년(숙종 18) 10월에 태어나자 이듬해 2월에 태장하였으며, 1762년(영조 2) 9월 가봉(加封)하였다. 영조는 선왕 경종의 태실을 꾸미고, 순호군(巡護軍) 16명을 두어 3년마다 위안제(慰安祭)를 지냈다. 태장(胎藏) 시 태실비에 ‘강희이십칠년십월이십팔일...
-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에 있는 조선 중기 장군 이수일 묘. 이수일(李守一)[1554~1632]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치고, 이어 경상수사로 옮겨 분전하였다. 후에 경상우병사에 이르러 1605년 선무공신의 호를 받고, 이괄의 난에 난군을 무찌르고 진무공신의 호를 받았다. 계림군, 부원군으로 가봉,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무(忠武)이...
-
충청북도 충주시 풍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무신 임경업 장군 묘. 임경업(林慶業)[1594~1646]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의주부윤으로 적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명나라와 내통하여 청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청에 잡혀 있던 중, 심기원의 모반에 연루되었다 하여 본국으로 송환되어...
-
고려 후기에 제기된 충청북도 충주 지역으로의 수도 이전 주장. 고려 후기 왜구가 무차별적으로 침입해 오는 상황에서 수도인 개경 방어가 불안해지자 도참설(圖讖說)이 횡행하였다. 이에 충주(忠州)는 내륙의 오지라는 점에서 공민왕 때부터 천도지로 자주 거론되었다. 내륙의 요새이며 교통의 중심지라는 충주의 지정학적 조건은 천도지로 주목되기에 충분하였다. 1357년(공민왕 6) 승려 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