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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381
한자 禁衛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웅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682년연표보기 - 금위영 설립
폐지 시기/일시 1881년연표보기 - 금위영 폐지

[정의]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설치되었던 노량진을 관할한 조선 후기의 군영.

[개설]

1682년(숙종 8) 병조(兵曹)의 정초군(精抄軍)과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훈련별대(訓鍊別隊)를 합쳐 설치한 군영으로, 훈련도감·어영청(御營廳)과 함께 삼군문으로 불리면서 국왕 호위와 수도 방위를 담당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금위영은 국가 재정으로 운영되던 훈련도감 군사를 줄여 국가 재정도 충실히 하고, 수도 방위를 위한 군사력도 확보한다는 목적에서 설치되었다.

[관련 기록]

금위영 관련 등록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159책,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19책 소장되어 있다.

[내용]

1682년(숙종 8) 병조의 정초군과 훈련도감의 훈련별대를 합쳐 설치한 금위영은 병조판서가 대장(大將) 직을 겸하다가 1754년(영조 30)부터 별도의 대장을 임명함으로써 독립된 군영이 되었다. 금위영의 초기 편제는 1영(營) 5부(部) 20사(司) 105초(哨)였는데, 1704년(숙종 30) 군제를 개혁할 때 1영 5부 25사 125초로 재편되어 삼군문의 하나인 어영청과 같게 되었다.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는 자문 역할을 하였고, 대장과 중군(中軍), 별기위(別騎衛) 별장(別將), 천총(千摠), 파총(把摠), 낭청(郞廳), 초관(哨官) 등이 지휘부를 이루었으며, 별무사(別武士)와 기사(騎士), 별기위, 표하군(標下軍), 별파진(別破陣), 그리고 다수의 향군(鄕軍)과 보인(保人) 등이 병력을 형성하였다. 향군 125초는 25개 단위로 구분되어 5초씩 서울로 올라와 2개월 동안 복무했으며, 보인은 포를 바쳐 금위영 재정을 뒷받침하였다.

숙종 때 과천현(果川縣) 북쪽에 있던 노량나루에 진(鎭)을 설치하고 별장을 두었는데, 이를 금위영에서 관할하였다.

[변천]

1881년(고종 18) 군제 개혁의 일환으로 장어영(壯禦營)에 통합되었다.

[의의와 평가]

금위영의 설치와 운영, 폐지 과정은 조선 후기 중앙 군영의 운영 실상과 변화 및 그 원인을 잘 보여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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