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나루와 경강상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004
한자 銅雀津 京江商人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웅호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근처의 한강 연안에 있던 조선 시대 나루와 경강 일대에 근거를 두고 대규모로 상행위를 영위하던 상인 집단.

[동작 나루와 교통로 역할]

동작나루[銅雀津]는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에 있던 나루터였다. 지금의 반포아파트 서쪽의 이수천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며, 서울특별시 동작구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 동재기나루, 동작도(銅雀渡)라고도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루 위쪽에 모노리탄(毛老里灘)과 기도(棋島)가 있다.”고 기록돼 있으며, 『해동지도』·『조선지도』·『대동여지도』 등을 비롯한 조선 후기에 제작된 지도 속에 동작진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 동작진은 서울과 남쪽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한 나루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전라·충남의 물화는 주로 서해를 통해 한강 하류로 들어와 서강·마포·용산에서 하역되었고, 영남·충북·강원의 물화는 한강 상류를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사람들도 강화 방면은 양화진을 건너갔고, 삼남 지방으로는 고려 때처럼 한강진을 건너 사평도(沙平渡) 방향을 택하거나 좀 더 동쪽에 있는 광나루를 건너 내려갔다. 도성 서남쪽의 서소문과 동남쪽의 광희문 일대가 상대적으로 평탄하여 이곳과 연결된 서강·마포·용산과 한강진·광나루 쪽이 교통로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는 성저십리 지역에 거주민도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동작진의 경우 이곳을 건너더라도 남산이 앞을 막고 있어 서울과 남쪽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강 지역이 전국적 상업 중심지로 성장한 조선 후기에 경강변 여러 나루터들이 활기를 띠면서, 특히 수원 화성이 건설되어 서울과의 왕래가 활발해지면서 비로소 동작진도 남쪽 지방과 통하는 주요 나루터의 하나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동작진은 남태령을 넘어 과천을 지나 수원 화성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또한 호남과 호서 지역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이 판교(板橋)를 거치면 한강진(漢江津)을 건너 입경하지만, 진위(振威)를 통과할 때에는 이곳 동작나루에서 한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갔다. 동작진을 통하면 진위에서 서울까지 하루면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한강진·노량진·양화진은 관에서 관리하는 관진(官津)이었던 반면, 동작진은 관에서 관리하는 나루가 아니었다. 동작진은 본래부터 ‘험진(險津)’이라 칭해졌는데, 사진(私津)이다 보니 통섭하는 자가 없어 종종 배가 침몰해 물에 빠져 죽은 일이 발생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후 수원 화성이 건설되고 서울과 수원을 연결하는 신작로가 새로 개설되면서 동작진에도 진선(津船) 5척을 배치하였고, 19세기 초에는 군영에서도 진선을 배치하여 금위영과 어영청, 훈련도감이 각각 6척, 2척, 1척을 동작진에 배치하였다.

[경강의 입지와 구분]

근대 이전에는 강의 명칭을 발원지에서 바다까지 통칭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대부분의 경우는 생활권을 기반으로 강줄기의 명칭을 달리하였다. 한강도 마찬가지였다. 한강 상류인 춘천 지역을 흐르는 강을 소양강, 평창을 지나는 강을 평창강, 영월을 지나는 물길을 동강, 여주 땅을 흐르는 물길은 여강, 용산 지역은 용산강, 마포 지역은 서강, 그리고 김포와 통진 일대를 흐르는 강을 조강(祖江)이라 불렀다. 조선 시대 ‘한강’이라는 용어는 발원지에서 서해까지 514㎞에 해당하는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었다. 조선 시대 한강은 남산을 끼고 도는 한강진(漢江津) 주변의 강, 즉 지금의 한남대교 일대를 흐르는 강줄기를 일컬었다. ‘경강(京江)’이라는 용어는 조선 시대 한양 지역을 흐르는 강줄기를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 한양 사람들은 한강을 지칭할 때 대부분 ‘경강’이라 불렀다. 경강의 범위는 조선 시대 한성부의 행정구역에 포함된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였다. 그 사이에는 한강, 용산강, 서강이 포함되어 경강을 ‘삼강(三江)’이라고도 했으며, 시간이 흘러 경강 주변의 상업 마을이 확장되면서부터는 ‘오강(五江)’, ‘팔강(八江)’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같은 경강의 물줄기라고 해도 조류가 통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은 배의 운항 조건이 매우 달랐다. 그러므로 경강의 뱃길은 조류의 도달 지점을 기준으로 수상(水上)과 수하(水下)로 나뉘었다. 수상 지역은 조류가 통하지 않는 지역이며, 수하 지역은 바다에서 조류가 올라오는 최상류 지점까지를 가리켰다. 수상·수하 지역을 항해하는 선박의 구조도 크게 차이가 났다. 암초가 많고 물살이 센 수상 지역을 운항하는 수상선은 좁고 길었으며, 밀물과 썰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수하 지역을 다니는 수하선은 밑바닥이 넓었다.

수상과 수하를 구분하는 경계는 시기에 따라 달랐다. 한강의 오랜 퇴적 작용으로 인해 점차 조류가 올라오는 지점이 하류 쪽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 수상·수하의 경계는 두모포(豆毛浦) 이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한강의 퇴적이 심해져서 18세기 중엽에는 한강진 이상으로 조류가 올라오지 못했다. 수상과 수하 지역은 물의 흐름, 선박 구조 등 운항 조건이 크게 달랐기 때문에 각 지역의 상권도 윗강과 아랫강으로 구분되었다. 윗강 상권은 수상 지역인 서빙고, 두모포, 뚝섬 등지의 객주(客主)나 여각(旅閣)이 소속되었고, 아랫강 상권에는 수하 지역인 서강, 마포, 용산, 망원, 합정 등지의 객주, 여각이 소속되었다. 이들 포구 중에서 용산, 마포, 서강이 상업 포구로 번성한 까닭은 이들 포구가 조류가 미치는 최상류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경강상인의 다양한 활동]

경강 지역에는 경강상인 외에도 사기와 협잡을 통해 한탕을 노리는 무뢰배, 배로 운반된 화물을 창고까지 운반하여 먹고사는 지게꾼, 뱃사람들을 상대로 술을 판매하고 유흥을 제공하는 색주가, 뱃사람들의 안녕을 빌어주는 무당 등 다양한 계층이 살고 있었다. 이 중에서 경강상인경강 지역의 다양한 계층들이 살아가는 사회경제적 바탕을 제공하는 주체였다.

경강상인경강에 근거를 두고 상행위를 전개했던 상인으로, 상품 판매뿐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선상(船商)들을 접대하고, 이들에게 숙박과 음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상품 매매를 중개하는 상인층을 ‘경강 여객 주인(京江旅客主人)’이라 했다. 여객 주인은 도고(都賈) 상업의 성행에 따라 객상(客商)들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아래 둠으로써 상업 이윤을 가장 많이 축적하는 부상대고(富商大賈)로 성장하였다. 경강의 뚝섬과 밤섬에 위치한 조선소에서는 진선·참선(站船) 외에 2,000석(石)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선박도 건조하였다. 경강에서 건조된 선박을 경강선(京江船)이라 칭했는데, 경강선은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매우 튼튼하여 주로 먼 바다 항해에 투입되었다.

경강 선운업자(船運業者)들은 경강선으로 조세곡을 운송하여 선가(船價)를 취득하였으며, 경강의 선상들은 지역적 가격차를 이용하여 쌀이나 소금 등을 유통시킴으로써 막대한 상업이윤을 획득하였다. 이외에도 배로 운송된 화물을 창고까지 운반하는 영업을 하는 마계(馬契)·운부계(運負契) 등의 하역 운수업자, 사빙고(私氷庫)에 얼음을 저장했다가 봄부터 가을까지 얼음을 판매하는 장빙업자(藏氷業者), 서해에서 잡힌 어류를 냉장선인 빙어선(氷魚船)에 싣고 경강에서 생선으로 판매하는 빙어선 선주들이 있었다. 이와 같은 경강상인의 활동을 통해 경강은 전국적 시장권의 중심 시장으로 발전하였으며, 경강상업의 발전은 중세의 왕도(王都)였던 서울을 상업도시로 변화시킨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경강상인의 자본 축적과 그 한계]

경강상인은 정부가 필요로 하는 공용 물자를 조달하는 공인(貢人)이나 공인계(貢人契)를 창설하여 그 이익도 집적하였다. 세력 있는 경강상인경강의 여객주인업·선상업(船商業)·선운업·조선업·하역운수업 등에 모두 투자하여 이를 통합적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경강에서의 다양한 영업 대부분이 소수의 경강상인에게 집중돼 가면서 그들은 자신이 장악한 유통체계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올리는 유통구조를 창출했는데, 이른바 경강상인에 의한 도고 상업이 바로 그것이다.

경강상인의 도고 상업은 미곡·목재·소금·어물 등 대부분의 상품에서 나타나고 있었고, 여기에는 경강 부상(富商)뿐 아니라 양반 등 유력자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미곡을 예로 들면, 그들은 선상들이 공급하는 쌀 외에도 정부가 공인에게 지급하는 공미(貢米), 경주인에게 주는 역가미(役價米)도 통제 아래 두고 있었다. 또한 시중에서 소비자에게 미곡을 판매하는 소매상도 조종하였고, 더 나아가 서울 상업을 대표하는 시전(市廛) 상인까지도 경강 부상과 유력자들의 통제를 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경강상인의 미곡 독점으로 인해 한양 사람들은 큰 고통을 받았는데 이에 대한 저항의 대표적인 사례가 1833년(순조 33)에 일어난 ‘쌀 폭동’이었다.

경강상인경강뿐 아니라 한양, 더 나아가 전국의 유통체계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다른 상인들에 비해 그들의 자본력이 우월하였고, 다양한 영업을 겸하여 상품 유통 체계 안에서 조직력이 월등했으며, 그리고 중앙 권력과 결탁했다는 점에서 비롯하였다. 또한 경강상인의 도고 상업은 한양만이 아닌 전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광범하고 빠른 정보력 및 운송 능력을 바탕으로 미곡·어물·목재·소금 등의 시장가격을 조절하면서 상당한 이윤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궁가(宮家)·군영 등 권력기관이나 권세가들과 그 이윤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였다. 19세기 전반 세도정권이 집권한 시기에 경강상인의 자본 축적은 권력층의 침탈로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개항 이후 침투한 외래 자본과 경쟁하여 승리할 만큼의 자본 축적을 이루는 데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노량진·동작진에서 경강상인의 활동]

경강 변에 있던 나루 중에 노량진동작진이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영역에 해당한다. 노량진배다리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한양에서 시흥·수원 방면으로 갈 때 건너는 중요 나루였다. 18세기 후반 노량진에도 각지의 어선이 몰려 어물 매매가 활발했지만 서쪽에 있는 마포나 서강에는 미치지 못했다. 마포와 서강은 물이 깊고 넓어 부상대고의 큰 선박이 정박했지만, 동작진노량진은 물이 얕아서 작고 가벼운 선박만 오갈 수 있었다. 노량진에도 밤섬·뚝섬과 같이 조선소가 있었으므로 진선이나 각종 선박을 제작해 판매했을 것으로 보인다.

노량진동작진이 마포나 서강 같은 중요 나루보다 상업 활동의 비중이 적었던 것은 조선 후기가 되면 한강 퇴적이 심화되어 조류가 이곳까지 올라오지 않게 된 점, 마포나 서강에 비해 물이 얕아 큰 배가 운항하기 어려운 지리적 조건, 한강 북쪽이 아닌 남쪽에 설치되어 한양과의 상품 유통보다는 사람들의 왕래에 방점을 둔 통행로 기능이 강했다는 점을 그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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