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9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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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元成模 |
이칭/별칭 | 경범(景範),경심(景諶),송운(松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정민 |
출생 시기/일시 | 1569년 - 원성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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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3년 - 원성모 무과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37년 - 원성모 사망 |
묘소|단소 | 원성모 장군 순국비 -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
묘소|단소 | 원성모 묘소 -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배나루 |
신도비 | 원성모 신도비 - 전라북도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 대구평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원주(原州) |
대표 관직 | 찰방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된 조선 후기 무신.
[개설]
이산묘에 배향된 것은 후손들이 진안 지방에 세거하며 이산묘 창건 당시부터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안과 인연을 맺은 것은 원성모의 큰 며느리 구씨가 병자호란을 피해 진안군 상전면에 은거하며 산 이후부터이다. 후에 진안 유림들이 원성모의 내력을 듣고 충절 3부자를 영모사에 배향했다.
[가계]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경범(景範), 초휘는 경심(景諶), 호는 송운(松耘). 원산군(原山君) 원황(元滉)의 후예로 이조 판서 원계검(元繼儉)의 손자이고 참찬 원호영(元虎英)의 아들이다. 첫째 아들은 선전관 원승길(元升吉)이고 막내아들은 좌랑 원이길이다.
[활동 사항]
원성모(元成模)[1589~1603]는 35세 되던 1603년 무과에 급제해 선교랑 거산도 찰방[종 6품 현감과 동급]과 현령을 지냈다. 청렴 결백하여 지방관 시절 백성들에게 많은 선정을 펼쳤고 이를 잊지 못한 백성들이 선정비까지 세울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안산[현 시흥시]에서 말년을 보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까지 점령한 청군은 안산으로 진군해 왔고 원성모는 의병을 모아 정왕산으로 올라가 봉수 산성에서 적과 전투를 벌였다. 옛날 정왕산에는 봉수대가 있었고 현재도 인근 마을 이름엔 ‘봉우재’라는 명칭이 남아 있다.
원성모는 첫재 아들 원승길과 막내아들 원이길과 더불어 의병을 모아 봉수산성 전투를 벌였다. 청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의병을 이끌고 옥구도로 들어간 원성모는 적과 전투를 벌여 많은 적을 섬멸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기력이 떨어지고 무기가 떨어져 정왕역 뒤편 ‘배나루’ 마을을 향해 유언장이 담긴 활시위를 당겼다. 원성모가 유언장을 담아 보낸 화살을 정왕역 뒤 ‘배나루’ 마을 정왕산 중턱에 꽂혔고 유언장을 실은 화살은 원성모를 찾아 나선 가족들에게 발견됐다.
이후 원성모는 오이도 전투 끝에 적의 화공(火功)에 밀려 두 아들과 함께 전장에서 순절했다. 가족들은 화살이 떨어진 ‘배나루’ 마을 산 중턱에 삼부자의 시신을 묻고 장례를 치렀다.
[묘소]
묘는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배나루에 있었으나, 이곳 일대가 시화 지구 토취장에 편입되자 1990년경 본래의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원주 원씨 선영으로 이장하였다. 이장할 때 원성모의 미이라가 발견됐다. 원성모의 시신이 수염까지도 온전한 채로 속옷과 겉옷은 물론, 관복까지도 변색되지 않은 채 청나라 군사의 칼에 옆구리 두 곳을 맞아 순절하면서 흘린 혈흔이 관복에 벌겋게 스며 있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영조 때 순충 장의 형난 일등공신에 책록하고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충의(忠義)라는 시호를 받았다. 함께 전사한 첫째 아들 원승길은 후에 좌찬성 원릉군으로, 막내아들 원이길은 호조 좌랑으로 추증되었다.
판서 이광적이 지은 신도비가 진안군 상전면 용평리 대구평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