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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왕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700457
한자 賓王錄
영어공식명칭 Binwangrok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201 국립중앙도서관 외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배재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편찬 시기/일시 1290년(충렬왕 16)연표보기 - 빈왕록 편찬
간행 시기/일시 1359년(공민왕 8)년 경 - 빈왕록 동안거사집에 편입 간행
성격 문헌
저자 이승휴
간행자 이연종

[정의]

이승휴가 고려 후기에 편찬한 원나라 사행록.

[개설]

『빈왕록』은 고려시대 이승휴가 1273년 원나라 사행 때 쓴 기록물을 정리하여 1290년에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나중에 그의 아들 연종이 부친 문집 『동안거사문집』을 펴내면서 편입시켜 간행하였다.

[저자]

이승휴(李承休)[1224~1300]는 자가 휴휴(休休)이고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로, 경산부(京山府) 가리현(加利縣) 사람이다. 삼척은 이승휴의 외가 고을이다. 이승휴는 22세 때인 1245년(고종 32)에 예비시험인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29세 때인 1252년(고종 39)에 과거 급제를 하였다. 그러나 몽고 침입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41세 때인 1264년(원종 5)에 비로소 동문원 수제(修製)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승휴는 유교 문신 관료로서, 비판 지식인으로서 강직하고 청렴한 관직 생활을 하며 왕권 안정과 국가 번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승휴는 두 차례나 원나라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특히 이승휴는 충렬왕의 실정과 측근 세력의 불법 행위를 보고 분개하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당시의 잘못된 정치 현실을 개혁하려고 노력하던 이승휴는 끝내 충렬왕의 노여움을 사서 1280년(충렬왕 6)에 파직을 맞았다. 파직 당한 이승휴는 삼척두타산 자락 귀산 골짜기에 내려와 용안당(容安堂)을 짓고는 유유자적하며 불경 공부와 저술 활동에 매진하였다. 그 후 이승휴는 1300년(충렬왕 26)에 77세를 일기로 삼척에서 세상을 떠났다.

[편찬/간행 경위]

『빈왕록(賓王錄)』은 고려시대 이승휴의 원나라 사행록(使行錄)이다. 이승휴는 1273년(원종 14)에 원나라 황후와 황태자의 책립을 하례하기 위하여 파견된 하진사(賀進使)의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원나라 대도(大都)[현재 베이징(北京)]에 다녀왔다. 이승휴는 윤6월 9일 출발할 때부터 10월 초 개경으로 돌아올 때까지 110여 일 일정의 사행 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일기와 시 형식을 빌려 기록하였다.

그 후 이승휴는 1280년에 파직되어 삼척두타산 자락 귀동으로 내려와 용안당을 짓고 은거 생활을 하였다. 이때 이승휴는 그동안 방치해 둔 사행 당시의 기록들을 발견하고 이를 기초로 『빈왕록』을 저술하였다. 『빈왕록』 편찬 시기는 ‘병서(幷書)’에서 알 수 있듯이 1290년(충렬왕 16)이다. 사행을 다녀온 지 17년이 지난 때이다. 그 후 이승휴의 아들 연종(衍宗)이 부친 문집인 『동안거사문집(動安居士文集)』을 펴내면서 부친이 정리해 놓은 『빈왕록』을 ‘행록(行錄)’ 권4로 편입시켜 간행하였다.

[구성/내용]

『빈왕록』은 크게 보면 도입부[서문], 본문, 종결부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으로 시작하여 날짜별로 노정, 사행 일정, 견문, 느낌 등을 일기와 시 형식을 빌려 기록하고 후기(後記)를 병서하였다. 특히 서사 내용은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고, 여정의 감회 또는 관반사(館伴使)와의 수창(酬唱) 등은 시 형식을 취하여 일정과 느낌을 조화롭게 기록하였다. 그렇다고 매일 매일의 일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은 아니다.

『빈왕록』에는 근체시 12수, 장단구 2수, 고시 5수, 표(表) 4편, 계(啓)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 가운데 제목이 직접 드러나 있는 것은 몇 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시들은 작시(作詩) 배경 설명과 함께 제목 없이 쓴 것이다.

시에서는 출발한 직후부터 지루한 장마로 인한 말 못할 고생, 낯선 이국에서의 고국 산천에 대한 그리움, 연경(燕京) 사탑(寺塔)·석교(石橋)·대궐 등의 웅장함과 화려함, 전각 낙성식 등 각종 연회에서의 장엄하고 으리으리한 의식, 원나라 관반사 후우현(侯友賢) 및 일행 송송례(宋松禮)[1207~1289]와의 수창 등 사행 중에 접하고 느낀 수많은 일을 읊었다. 이들 작품에서는 이승휴가 이국의 경관에 감탄하는 모습과 함께 원나라의 새로운 문물에 압도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 이승휴가 원나라의 정치력을 실감하면서 고려의 왕권 안정을 위해 관반사 후우현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을 느낄 수 있다.

표와 계에서는 원나라 황실에 대한 하례(賀禮) 내용이 담겨 있다. 특히 황후와 황태자 책봉을 하례한 표문(表文)은 격식을 잘 지키면서도 차분하게 하례의 진정성을 잘 드러냈다고 하여 원나라 세조와 중국인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승휴가 뛰어난 문장력으로 외교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이승휴『빈왕록』에 자신의 두 번째 원나라 사행 경위까지 기록하였다. 그는 1274년(원종 15)에 국왕의 승하를 애고(哀告)하러 다시 원나라에 갔다 왔다.

[의의와 평가]

『빈왕록』은 현존하는 사행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려시대 원나라에 공식 사행을 다녀와서 저술된 사행록으로는 이승휴『빈왕록』이 유일하게 전하고 있다. 이러한 『빈왕록』에는 사행 일정뿐만 아니라 대도에 도착해서 있은 예식 절차와 당시의 정경 등을 잘 묘사하고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크다.

『빈왕록』은 비록 이승휴 개인의 사행 기록이지만 이승휴가 외교 목적을 위하여 파견된 만큼 고려 입장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서 『빈왕록』을 통하여 당시 고려의 원나라에 대한 정치 태도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이와 함께 당시 원나라에 대한 고려 지식인들의 의식 변화, 특히 고려 왕실의 권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원나라 사대 정치를 무릅쓰는 전환기 지식인들의 태도와 원나라 문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살필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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