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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002
한자 家族生活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영하

[정의]

가족형태, 거주형태와 부부관계, 자녀관계 등 가족을 중심으로 한 생활 모습.

[가족형태]

성남은 1990년대 초 주택 200만호 건설의 일환으로 분당이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기존의 중심축이었던 수정구중원구분당구가 새로이 추가되었다. 분당은 다수의 외지인들이 이주해 온 지역으로서, 기존의 도심지역 주민과 토박이 주민들의 생활과 비교해서 상이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성남지역만큼 원주민과 신도시지역 주민 사이에 의식이 분명하게 드러난 곳도 드물 것이다. 원주민 거주지역들은 대부분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인근 지역의 산업화와 개발의 회오리바람 속에서도 일정 부분 전통적인 삶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으로 가족은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단위이다. 가족은 남녀 부부가 중심이 되어 자녀와 부모를 근간으로 구성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대가족제도를 지향해왔다. 즉, 가족은 하나의 생산단위로서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공동 노동력의 원천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성리학에 기초한 윤리관이 형성되면서 가부장적 대가족제도는 이상적인 가족형태로 인식되었다. 결국 18세기에 들어와서 조선 사회는 가부장적 대가족제도를 완성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대부분 경제형편이 좋은 양반 가문에서 주로 시행되었다. 양반이 아닌 경우, 대가족을 유지할 수 있는 건축물로서의 집을 갖추기 어려웠기 때문에 주로 부부가족 중심으로 가족이 유지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한국인의 9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의 가족형태는 대부분 부부가족 중심으로 변했다. 특히 아파트의 대대적인 공급은 조부모, 부모, 자녀로 구성되는 대가족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주지하듯이 현재 성남시의 전체 세대 중 90% 이상은 아파트, 연립주택, 다세대주택 등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성남시민의 가족구성이 부부가족 위주임을 보여주는 증표이다.

특히 경제조건이 개선되면서 1920~30년대에 출생한 부부의 경우, 노년에 접어들어도 가능한 자식의 양로를 원하지 않는 사례가 많다. 상호간 생활의 불편을 이유로 내세워 부부가 단독으로 거주하려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이 점은 노년을 보낼 수 있는 조건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방 2~3개와 거실로 구성된 아파트형 주거의 형태와 도시형 직업이 보편화되면서 서구식 핵가족주의가 편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에서는 토박이와 이주민을 중심으로 그들의 가족생활의 실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거주형태와 부부관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에 거주하는 김양식(가명, 1923년생)은 분당의 구미동에 살고 있었던 김소현(가명, 1928년생)과 결혼하였다. 김소현의 친정은 서흥을 본관으로 갖고 있다. 조부와 부친께서 구미동에서 대를 이어가면서 한약국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마을주민들은 김소현의 집을 ‘약국댁’이라고 불렀다. 그동안 구미동이 분당 개발의 일환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지금도 그곳 토박이들에게 ‘약국댁’을 물어보면 모두 알고 있을 정도다. 김양식은 젊은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현재의 거주지에서 농사를 지어 가정경제를 꾸려왔다. 특히, 6.25 참전 이후부터 그는 토마토, 오이, 수박 등 특수작물을 경작하였다. 한때 그는 주위 농가보다 풍작을 이루고, 소득을 많이 올려서 그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김양식은 마을 이장과 노인회장을 다년간 역임하였다.

3남 2녀의 자녀를 모두 출가시킨 김양식은 현재의 집에서 부부만 거주한다. 지금의 집은 1970년대 중후반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현재 위치에 들어설 때, 지어진 18평 규모의 ‘문화주택’이다. 이 주택을 지을 당시 부엌에 연탄으로 난방과 취사를 하여서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5년 전에 난방방식을 기름보일러로 바꾸면서, 그 구조도 기존 재래식에서 입식으로 바뀌었다. 집은 방 2칸, 세면실 겸 화장실, 부엌, 거실로 구성되어 있다. 현관을 들어서면서 거실 왼쪽으로 안방, 오른쪽으로 건넌방과 세면실, 그 사이에 부엌이 자리잡고 있다. 부엌에는 가스레인지, 전기밥솥, 냉장고, 찬장이 놓여 있어서, 부부는 식사를 소반에 음식을 차려서 거실에서 한다. 찬장에는 김소현이 예전부터 사용하여 왔던 사기그릇과 접시, 본 차이나 그릇이 주로 진열되어 있었다. 거실에 TV, 비디오, 오디오, 소파가 놓여 있어, 잠자리를 제외하면 부부의 가정생활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중원구 새말에 살고 있는 이영호(가명, 1941년생)는 1925년 을축년 홍수 당시에 서울 송파에서 지금의 동네로 이주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씨는 1941년 작은 새말에서 태어났다. 이씨의 가옥은 태어날 때 초가였으며, 고등학교 시절에 기와집으로, 1970년대에 슬레이트집으로, 1990년대 들어서 벽돌과 슬라브집으로 신축하였다. 이씨는 장영선(가명, 1944년 생)과 1967년에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으며, 현재 모친(1916년생)을 모시고 산다. 이씨는 성남에서 사회단체와 정당 활동을 했던 관계로 경제적인 문제로 부인과 가끔 충돌을 빚었다. 부인 장씨는 혼인 이후에도 특별한 기술을 가지지 않았으나, 지금도 직장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한 집에 살고 있는 이씨 가족 셋은 부부가 월급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녀들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는다.

분당구 판교동에 거주하는 이범수(가명, 1932년생)는 현재 거주하는 곳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학교를 다닌 순수 토박이다. 이범수는 사범학교 시절인 20세에 동네 아주머니 중매를 통해서 이상완과 혼인을 하였다. 슬하에 2남 3녀를 두고 있다. 부인 이씨의 친정은 용인시 마평리이다. 그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하였다. 현재 부인 이씨는 노환으로 스스로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범수는 교직생활을 하면서, 집안에서 필요한 정도의 농사도 함께 직접 지었다. 주로 채소 중심으로 1,000여평 정도 경작하였다. 교직원의 급여로 생활하기가 다소 어려웠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대학교육을 시키지 못하였다. 자녀들 역시 스스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였다. 이들은 산업화과정에서 대졸자와 고졸자의 대우가 비슷해서 돈을 우선 벌려는 의식이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이범수는 자녀들에게 성실을 가훈으로 가르쳐 왔다.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가는 신발장 위의 돌에 ‘가훈 성실’을 표식하여 올려놓아서, 가족들이 집안을 출입할 때마다 마음속 깊이 새기도록 하였다.

현재 이범수 부부는 큰아들 부부와 손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큰아들 부부의 점포가 집 근처에 있고, 부부가 함께 점포를 운영하기 때문에 손자녀를 돌보기 위해 함께 산다. 특히 큰며느리는 점포에 있으면서도 수시로 집에 들러서 집안일을 하고 있다. 집안의 대부분 살림살이는 큰며느리가 맡아서 한다. 이범수의 집은 1974년에 지은 문화주택이다. 그동안 외형은 바꾸지 않고, 실내 구조를 생활하기에 편리하도록 약간 변형시켰다. 처음에 부엌은 연탄아궁이를 갖춘 재래식이었으나, 지금은 입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집 정면으로 대문과 동쪽으로 작은 대문이 있었으나, 마당을 확장하면서 정문이 기능을 하지 못한다. 더욱이 집 앞에 창고가 들어서면서 정문은 기둥만 남기고 없애버렸다.

분당구 미금동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욱수(가명, 1952년생) 부친의 고향은 평택이지만, 그는 서울 신당동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보냈다. 이씨는 1980년 교회에서 박계원(가명, 1958년생)을 만나 교제하다가 결혼하여 슬하에 2녀를 두고 있다. 현재 부부와 자녀가 함께 거주한다. 분당으로 이사하기 이전에는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 살았다. 1995년에 지금의 아파트를 분양을 통해서 입주하게 되어 이사를 하였다. 그런데 이씨의 직장은 서울 오류동이기 때문에 매일 승용차로 서울까지 출퇴근을 한다. 부인 역시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별도로 경차를 구입하여 출퇴근을 한다. 이들 부부는 모두 서울에 직장이 있기 때문에 가족 사이에서 함께 보낼 시간이 평일에는 거의 없는 편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이용하여 가족과 함께 인근 공원으로 산책을 하지만, 아이들이 크면서 부부와 자녀 사이는 날이 갈수록 소원해지고 있다.

[자녀관계]

분당구 운중동에 거주하는 김양식(가명, 1923년생) 부부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고 있다. 큰아들은 분당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으며, 아들 둘을 두었다. 둘째아들은 성남세무서에 다니는데, 1남 1녀를 두고 있다. 셋째아들은 처음에는 서울 방배동에서 입시학원을 운영하다가 현재는 종로로 옮겼다. 큰딸은 경기도 화성에 거주하면서, 경기도 부녀회장을 맡기도 했다. 작은딸은 용인시 수지 지역에서 한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자녀들은 명절과 부모님의 생신, 그리고 농사철에 정기적으로 부모님들을 찾아뵙는다. 특히 아들 내외들은 인근에 살고 있어 자주 내왕하는 편이다. 명절은 설날과 추석, 김양식씨 부부의 생일이다. 자녀들은 재료를 직접 사와서 음식을 준비할 뿐만 아니라, 김씨 부부에게 보통 10만원에서 20만원 정도의 용돈도 준다. 이들은 어버이날에 부모님을 위한 한약도 준비한다. 이에 부응하여 김씨 부부는 손자와 손녀들에게 용돈을 대신 준다.

농사를 짓는 봄과 수확하는 가을에는 아들 내외들이 일요일에 와서 어김없이 도와준다. 특히 고추를 심고 딸 때, 깨와 콩을 심고 털 때는 자녀들이 모두 모여 힘을 합친다. 아직도 김씨 부부는 깨를 털 때는 풍차와 키를 이용하고, 콩을 털 때는 도리깨를 이용한다. 이외에도 자녀들은 살림살이를 사드리는 것으로 생활에 보탬을 주고 있다. 가령 3단 김장독냉장고와 전자레인지 따위를 사가지고 온다.

큰아들 내외가 몇 해 전에 분당의 32평 아파트에서 49평 아파트로 이사룰 했다. 아들 내외는 부모가 나이가 들어서 함께 살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김씨는 아들 내외와 함께 살면 서로가 불편하기 때문에 끝내 거절하였다. 그는 자식들이 찾아와서 손만 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효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부부가 단 둘이 살아도 불편함이 없다고 여긴다. 게다가 집 이웃에는 친척과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분당구 판교동에 거주하는 이범수(가명, 1932년생) 부부는 큰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 아들 부부는 처음부터 외지생활을 하지 않고, 신혼부터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왔다. 아들 부부는 2층에, 이씨 부부는 아래층에 거주하고 있다. 이씨는 큰며느리를 잘 맞아들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동안 큰며느리와 갈등 없이 지냈으나, 언행과 옷차림 등 사소한 것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큰아들은 남매를 두고 있으며, 집 인근에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작은아들은 처음에 구성농협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였지만, 현재 판교농협에 근무하고 있다. 큰딸은 초등학교 교사와 결혼하여 가평에 살고 있다. 둘째딸은 서울에서 제과점을 운영한다. 셋째딸은 직업군인과 결혼하여 이곳저곳으로 이전해 다닌다. 큰아들을 제외한 자녀들은 명절과 부부의 생일 때 집에서 모두 모인다. 특히 작은아들은 가까운 곳에 살기 때문에 격주로 한번씩 집에 들른다.

분당구 미금동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욱수(가명, 1952년생)는 분당으로 이사했던 당시 큰아이는 중학생, 작은아이는 초등학생이었다. 큰아이는 중학교를 도보로, 고등학교 1~2학년 때에는 버스를, 3학년 때에는 부인이 승용차를 이용하여 등교시켜 주었다. 대학교는 서울로 진학하여 미금역에서 직행좌석을 이용하여 통학하였다. 작은아이는 초중등학교 모두 도보로 통학하였다. 아이들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국어, 영어, 수학 중심으로, 수업이 끝난 후에 미금역 주변에 있는 입시학원을 다녔다. 이씨 수입은 5백여만원에 이르렀는데, 이중 자녀 교육비로 상당액이 지출되었다. 부인은 남편의 사업 번창과 아이들의 성적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다. 큰아들이 고3일 때는 성적향상과 대입진학을 위해서 인근의 교회로 새벽기도를 매일 다녔을 정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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