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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132
한자 集姓村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성남시
집필자 문수진

[정의]

한 마을에 같은 본관을 가진 성씨끼리 함께 모여 사는 곳.

[개관]

집성촌이란 동족마을이라고도 부르며 성씨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원시사회에서 씨족생활이 이루어지듯이 근대 도시사회로 발전하기까지 농업국가에서는 같은 씨족끼리 모여 살게 되어 있다. 우리 민족이 성(姓)을 가진 것은 아득히 먼 옛날이다. 그러나 왕족이나 귀족은 일찍부터 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천민이나 노예는 근대사회까지도 성이 없이 존재하였다.

성씨가 보편화된 것은 고려 초의 일이다. 태조가 호족연합을 꾀하면서 각 지역의 호족을 통합하는 수단으로 성을 주었던 것이다. 심지어 태조의 개국공신인 신숭겸, 배현경 등도 처음에는 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성씨가 고려 초에 그 시조(始祖)두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데, 이후 각 지역에 본관을 가지고 성을 칭하게 된 것이다.

집성촌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한 종족이 어느 한 마을에 계속해서 여러 대에 걸쳐서 거주하는 경우와, 자기 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새 마을을 구성하고 후손들이 그 마을을 계속해서 발전시킨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성촌의 발생요인의 하나로 우리 사회가 혈연공동체 생활을 영위한 데서 온 유습을 들 수 있다. 마을의 제반 행사에 모두가 힘을 합하고,향촌사회의 노동집약적인 일들도 자발적으로 상부상조하며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동족마을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내용]

성남시 지역은 조선시대 광주목에 속하여 있던 곳으로 수도 서울에 가까워 중앙의 권세가들이 낙향하거나, 사패지(賜牌地 : 나라에서 주는 토지)를 받거나, 선조의 묘를 쓰면서 후손들이 이주하여 사는 경우가 많았다. 지방 농촌에는 지금도 집성촌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성남시의 경우는 급격한 도시화의 전형이다. 도시계획으로 인한 집단 이주와 철거로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곳이 극히 드물다. 1960년대 말부터 급속히 추진된 도시화는 성남의 집성촌이나 세거지(世居地)의 기능을 해체시켰던 것이다. 이주민이 대거 정착하기 이전에 형성되었던 집성촌이나 세거지는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자취를 볼 수 있는 곳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전의 집성촌 역사를 알 수 있다.

(1) 주요 집성촌 : 성남시에 집성촌으로 나타나는 곳은 상당수 있다. 『성남시사』(1993)에 나오는 세거성씨는 본관을 밝힌 것이 77개, 성만 밝힌 것이 8개가 나온다. 전주이씨가 28곳에서 세거하고, 김해김씨가 15, 광주이씨가 13, 남양홍씨가 11, 밀양박씨가 9, 경주이씨, 경주최씨가 8, 문화유씨, 순흥안씨, 파평윤씨, 동래정씨가 7개의 세거지를 갖고 있다. 전주이씨가 많은 것은 조선왕조가 건국하고 왕족으로서 도성에 가까운 성남지역에 낙향하거나, 사패지를 많이 받고, 선조의 묘역 등을 조성하면서 세거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의령남씨, 평산신씨, 청주한씨가 6개, 진주강씨, 경주김씨, 광산김씨, 전의이씨가 5개, 안동김씨, 고성이씨, 성주이씨, 한산이씨, 평택임씨가 4개의 세거지를 가지고 있어 다수 거주하는 성씨로 나타났으며, 전체적으로 270개의 세거지가 찾아지고 있다.

많은 세거지를 가지고 있다 하여 반드시 다수 주민이 거주한다고는 할 수 없다. 세거지 수로는 적지만 조선 초 개국공신인 남재의 후손이 태평동 일대에 거주하고 집성촌을 형성하여 ‘남씨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의령남씨, 세조~성종대의 재상 한계희의 후손이 분당 일대에 거주하여 집성촌을 이룬 청주한씨, 광주이씨상대원하대원에 거주하고, 광산김씨금광동 일대에 거주하고, 한산이씨정자동 일대에 거주하여 큰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집성촌과 세거지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도 문제다. 세거지가 곧 집성촌이라 할 수도 있지만 세거하면서도 집성촌의 형태를 이루지 못한 경우도 있다. 세거지 수는 많지만 집성촌을 형성하지 못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세거지 수는 적지만 큰 집성촌을 형성한 경우도 있다.

(2) 집성촌 분포 : 앞에서 서술한 『성남시사』의 집성촌에 대한 서술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현재의 도시화로서 거의 알아볼 수 없으므로 이를 근거로 해서 26개의 집성촌 형태를 추려볼 수 있었다. 전주이씨궁내동, 석운동, 정자동 정자리, 중간말에 네 개의 집성촌을 형성하여 가장 많다. 다음으로 김해김씨구미동(오리뜰), 동원동(광주머내)에, 밀양박씨하대원동(뒷말), 구미동(뒷구미)에, 광주이씨신촌동(작은새말), 하대원동(안골)에 각각 두 개씩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한 개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경우는 진주강씨(복정동 안골), 제주고씨(동원동), 광산김씨(금광동), 연안김씨(양지동), 의령남씨(태평동 탄리), 순흥안씨(심곡동), 해평윤씨(복정동 웃말), 경주이씨(야탑동), 고성이씨(도촌동 중촌), 덕수이씨(고등동 등자리), 성주이씨(야탑동 상탑), 연안이씨(판교동), 우계이씨(대장동), 전의이씨(구미동 골안), 한산이씨(수내동 너머역말), 평택임씨(갈현동)가 있다. 집성촌이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청주한씨율동에 한씨촌을 형성하고 있어 큰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3) 집성촌 형성 사례 : 성남시의 집성촌 형성에 대하여는 다음 몇 가지 사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고려 말에 은거하여 후손이 세거한 것으로는 광산김씨 김약시(金若時)금광동(현재 단대오거리역 단대쇼핑 일대)에 은거하여 후손이 세거하고, 광주이씨 이집(李集)의 후손들이 세거하여 후손이 하대원동에 대대로 살았다.

둘째, 조선 초에 낙향하거나 이주하여 산 사람의 후손이 세거한 곳이 가장 많다. 밀양박씨(하대원동), 전의이씨(구미동), 김해김씨(구미동), 전주이씨(정자동) 등이 있다.

셋째, 사패지에서 후손이 세거한 것이다. 원주원씨(사송동), 문화유씨(복정동), 연안이씨(판교동), 전의이씨(대장동), 전주이씨(궁내동) 등이 있다.

넷째, 묘지를 쓰고 후손이 세거한 곳이다. 안동권씨(금토동), 장연노씨(복정동), 해주오씨(대장동), 남원윤씨(금토동), 덕수이씨(고등동), 전주이씨 덕양군(궁내동), 신종군 공간공 이효백(李孝伯)[석운동], 효령대군 후손 문화공(文化公)[분당동], 이축(李軸)[분당동], 한산이씨(수내동), 나주정씨(백현동), 청주한씨(율동) 등이다. 이 중 안동권씨, 장연노씨, 남원윤씨, 청주한씨 등은 묘지를 사패지로 받은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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