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구보의 어머니는 혼자 몸이었다. 생계를 위해서는 일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집 짓는 공사장의 잡부가 되었다. 다행히 집짓는 일거리가 끊이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그렇게 번 돈을 조금씩 떼어 벽돌을 사다 날랐다. 그리고 저 아래쪽 개천의 모래를 퍼다 날랐다. 어머니도 형도 누나도 그리고 소년도 틈만 나면 개천의 모래를 세숫대야로 퍼다 날랐다. 그리고 시멘트를 사다가 조그만 집을...
석유가게를 접은 지 그럭저럭 1년이 지났을 때, 백씨의 남편은 상대원으로 돌아와서 다시 석유가게를 냈다. 원래 남편은 서울 마포 사람이었다. 총각 때 누나(지금의 시누이)를 쫓아 성남으로 왔다. 그리고 상대원 최초의 석유가게였던 대원석유에서 직원으로, 소장으로 일했었다. 총각 때부터 해오던 일이라 우선 시작하기는 쉬웠다. 석유는 전화 장사였기 때문에 고정 고객 확보가 중요했다. 그...
언제부턴가 상대원1동 쪽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다. 공장에서는 서울서 온 철거민들이 일을 했다. 젊은 사람들부터 아저씨 아줌마들까지 상대원 공장으로 일을 다녔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온 총각 처녀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들 모두에게 인근의 상대원시장은 삶의 거점과 같은 곳이었다. 쉬는 날이 오면 상대원시장통에는 총각 처녀들로 넘쳐났다. “일요일 날 보면은 그 젊은 청년들이 아가...
여덟 살 때 다시 성남으로 돌아오기 전, 우리 가족은 이천 쪽에서 살았다. 아빠는 제조업 분야에서 일했다. 라켓을 만들던 한일라켓, 구두를 만들던 에스콰이어 공장에서 근무하였다. 이천은 아빠의 일터가 있던 곳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과 들로 물로 돌아다니던 이천이 그립기도 하다. 그후 성남으로 다시 돌아온 우리 가족은 금광2동에 자리를 잡았다. 경사가 심한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
상대원시장은 상대원공단과 지역적으로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궁씨는 상대원시장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공단의 인력을 시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주민 자치센터 위원장이 되면서부터는 그런 생각이 보다 분명하고 확고해졌다. 그래서 기회만 생기면 이런 생각을 말해 왔다. 오늘도 궁씨는 혹시 할 말을 빠뜨리지 않았나 걱정이다. “아 내가 한 마디 덜한 게 하나 있다. 지금...
염씨가 상대원으로 왔던 80년대 초는 장사가 참 잘 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상대원공단은 활발하게 돌아갔고, 근로자들이 시장의 주요한 고객이었다. 젊은이들은 간이부엌이 딸린 방 하나 짜리에 주로 살았다. 방안에는 비키니 옷장 하나에 조그마한 호마이카상이 놓여 있었고, 부엌에는 석유 곤로와 밥공기와 국그릇 정도가 갖추어졌다. 또한 돌이나 백일이 되면 뷔페를 찾는 지금과는 달리, 8...
경기도 성남시에서 1987년 6월에 발생했던 반독재 민주화 운동. 12·12 사태로 집권한 제5공화국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이 장기 집권을 위해 재야와 야당 인사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에 맞서 재야 인사를 비롯한 학생·노동자 등 국민들은 직선제 개헌 주장을 키워갔고, 1986년 5월 3일 수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인천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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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원은 잘 사는 동네였고 은행동은 못사는 동네였다. 상대원공단이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69년도 70년도에 철거민들이 들어와 천막촌을 형성할 때만 해도 상대원동이 이렇게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고 생각치 못했다. 처음 철거민이 들어왔을 때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동네였다. 아니 오히려 어린 궁씨에게 그건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처음에 철거민들 들어와 갖고 군용텐트 촥 쳐갖고 거기다가...
궁씨가 중학생이었을 때 상대원공단은 활기가 넘쳤다. 아침 상대원 거리는 공단에 출퇴근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공단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어마어마 했어요 그냥 뭐 봇 진짜 그야말로 뭐 봇물이라고 그러나 막 밀고 들어가는 그러고 다녔어요 샤니케잌 뭐 또 콘티빵 뭐 이런 때는 진짜 인구 많았었고. 또 상대원에 방이 웬만하면 방이 조금만 꾸며서 놔도 다 세가 나가고, 어릴 때 우리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