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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151
한자 孝子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성남시
집필자 문수진

[정의]

부모를 잘 섬기는 아들.

[개설]

효 또는 효도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지배한 전통적인 규범으로서,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정성껏 모시는 것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뒤에도 극진히 제사를 모시는 것 등을 포함한다. 역사적으로 유교사상이 전래되면서 효도가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 아버지가 굶어 죽게 되자 자신의 살을 베어내어 들게 한 충청도 공주의 향덕(向德)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이는 효도를 그만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을 더욱 존중하고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었다. 유교는 충효사상을 중시하였는데, 특히 효는 백행의 근본이라 하였다. 경기도 성남시 출신으로 효행이 뛰어난 인물이 많이 있는데, 이 지역에서 태어나거나 활동한 사람보다도 죽은 뒤에 묘소가 있는 경우가 많다.

[권수(權授)]

안동권씨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출신이다. 현감을 지내다 부친이 병환으로 위중하자 사직하고 내려와 병시중을 하였다. 병세가 깊어져 사경을 헤맬 때는 이빨로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를 부친의 입에 흘려 넣는 효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3년간 여묘하며 소채나 염장을 일체 멀리하고 미음으로만 연명하며 너무 슬퍼하여 병이 되었다. 이에 모친께서 꿈속에 나타나 닭고기를 먹여주는 꿈을 꾸고 깨어나 보니 닭고기 냄새가 여전히 나는지라, 통곡하며 이것은 자신의 효성이 부족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한탄하였다고 한다.

[김호(金鎬), 김약(金鑰) 형제]

광주 돌마면 거주자로, 어려서부터 형제 모두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 아버지가 괴질에 걸리자 급히 서둘러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서 소생시켰다. 그후 아버지가 또 10여년 동안이나 종기를 앓게 되었는데 진한 고름이 흘러나오자 두 형제는 번갈아가며 입으로 빨아내니 그 맛이 똥과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자 두 형제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한 번도 아내를 보러 집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심의진(沈宜晋)]

: 청송심씨로 1816년 부친과 조모상을 연이어 당하여 집상(執喪 : 부모의 상중에 극진히 예를 갖춤)의 예를 마친 후 효희전참봉(孝禧殿參奉)에 제수되었다. 1825년 문의현령으로 나갔다가 2년 후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묘가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에 있다.

[이로(李潞)]

고성이씨로 화성시 팔탄면 하저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 : 잠자리에 들고날 때 문안인사를 함)하였다. 문중의 선영에다 세도가에서 투장(偸葬 : 몰래 장사지냄)하였으나 문중에서는 후사를 겁내어 나서는 이가 없었다. 이에 밤에 가서 묘를 파서 시신을 등에 매고 관가에 나가 선영에 몰래 묻은 묘를 파헤친 것이 죄가 된다면 기꺼이 벌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 관원들은 그 선조를 받드는 정성에 감복하여 죄를 주지 않고 시신을 후손에게 넘겨 이장하도록 하였다. 묘는 성남시 분당구 갈현동 선영에 있다.

[이원철(李元哲)]

: 전주이씨로, 어려서 어느날 밤에 도적이 침입하여 가인들을 겁탈함에 모두 달아났으나 홀로 모친의 방을 지킴에 도적들도 이를 보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항시 혼정신성(昏定晨省 : 잠자리에 들고날 때 문안인사를 함)을 다하고 구미에 맞는 음식으로 보양하였다. 1667년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여 규곡(叫曲 : 부르짖음)하고 슬퍼함이 너무 커 인근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1670년 삼강(三江 : 서울의 한강, 용산강, 서강의 통칭)의 사민(士民)들이 그 효행을 예조에 포상을 청함에 보직을 제수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묘는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에 있으며 부인 원주원씨와 합장하였다.

[이형신(李炯信)]

전주이씨로, 광해군 때 부친이 유배당하자 귀양지까지 따라가 지극힌 정성으로 모셨다. 인조와 효종의 대상(大喪 : 임금의 장례) 때에는 혼전(魂殿 : 국상 뒤 신위를 모시는 전각)의 제관(祭官 : 제사를 맡은 관원)이 되어 모든 일을 고례에 따라 치렀다. 묘는 성남시 분당구 궁내동에 있다.

[홍수원(洪晬元)]

남양홍씨로 강화 출신이다. 홍익한(洪翼漢)의 아들로,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친이 악성 종기로 병을 앓아 매우 위태로울 때 입으로 종기의 고름을 빨아내고 대변을 받아내는 등 온갖 정성으로 시병하였다. 1637년 청군이 강화섬을 함락하고 백성들을 도륙하자 계모 허씨를 모시고 교동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포구에서 적을 만나 위태롭게 되자 계모를 가로막아 보호하려다가 적의 손에 피살되었다. 1683년 정려(旌閭 : 정문을 세워 표창함)를 하사하여 그 효행을 칭송하였다. 묘는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한산이씨 묘역 내에 있다. 부인이 한산이씨 이확(李穫)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상석의 측면에 숙종 때 내려진 정려문기가 음각되어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환기(宋煥箕)가 썼으며 1803년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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