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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구 고등동 지역 마을지 - 개인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215
한자 壽井區高登洞地域-誌-個人史
지역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고등동

고등동 등자리마을에서 성장한 이찬은 현재 81세로 일제시기와 해방 후 격동기를 살아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등자리마을에서 노인회장으로 있으면서 마을 일을 비교적 소상히 기억하고 있다.

덕수이씨 가문인 이찬은 유교적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한 것으로 드러난다. 실제로 이 마을에는 이씨 문중이 설립한 강습소가 있어 근대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서당에서 한문교육을 받았다. 당시 일제하에 대왕면에는 국민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서당 교육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문중 재산이 쇠락해져 할 수 없이 세곡동에 생긴 대왕국민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교실은 2개였고 일본 사람이 교장, 한국인 선생 1명이 전부였다. 이 학교에 들어간 것은 10살 때이며 나이가 많아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이 학교에서 4학년까지 있다가 송파에 있는 국민학교 5학년에 들어가 졸업하게 되었다.

일제시대 영등포 지역에서 잡일을 하다가 징병으로 군대에 끌려가게 된 것이 중요한 사건이다. 징병으로 군대에 갔는데, 평양에 집결한 후 일본 본토로 건너갔다. 당시 제2국민역의 형태였으며 전쟁중 항거할 것을 우려하여 일본에 분산시키는 것을 노린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명목상 훈련을 거친 후 일본 하관에서 농사일에 종사하면서 군대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일본에서 돌아와 생활하던 중 6.25가 터졌고, 피란하여 내려가다 다시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이 내려오는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경우 인민군과의 충돌이 적어 비교적 무난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의 청년당 조직 때문에 시달렸고 희생이 컸다. 인민군이 물러난 후 면서기 생활을 하였다.

당시 면서기의 중요 임무는 공출에 관한 것이었고, 소실된 토지대장 등을 복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면사무소의 토지대장이 소실되어 회복등기라는 것을 시행했는데, 용인세무소에 일부 자료가 남아 이것을 참조하는 한편 일반인들에게 신고를 받아 등기를 복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유주가 변경될 소지가 있었지만 이장들의 확인이 요구되어 이런 일은 극히 어려웠다.

면서기를 그만둔 것은 군에 입대하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 논산훈련소를 나와 교육받고 부산의 병참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근무하였다. 제대 후 등자리마을에서 농사를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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