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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구 금광동 지역 마을지 - 마을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230
한자 中院區金光洞地域-誌-史
지역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금광동

[김영규]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세촌면 단대동(丹垈洞)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은행정이 논골, 금광리를 병합하여 단대리라 하여 중부면에 편입되었다.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에 편입되고, 1973년 7월 창곡을 병합하여 단대동으로 되었다. 단대동은 1976년 10월 단대1동, 단대2동으로 분동되었으며, 단대2동은 1980년 9월 단대2동, 단대3동으로 분동되었다. 그후 1989년 5월 단대2동은 금광1동, 단대3동은 금광2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중원구에 편입되었다.

금광동(金光洞)이란 이름도 광산김씨가 모여 사는 동네란 데에서 유래한다. ‘금괭이’라고 했던 것은 광김, 즉 광산김씨가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조선 건국 때 고려 말 직제학의 관직에 있던 김약시는 불사이군으로 고려를 섬기다 조선 이성계를 왕으로 받들 수는 없다 하여 현재의 금광동,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단대쇼핑 근처에 토굴을 파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 김췌(金萃)는 관직에 나아갔고, 손자 김순성(金順誠)은 한성부서윤을 지냈다. 김약시의 묘가 현 신구대학 자리에 있고 광산김씨 선산으로 종중 땅이었는데 성남시가 도시개발하면서 이장하였다. 광산김씨가 후손이 번창하고 현달하였다. 김순성의 묘소는 창곡동에 있고 거기에도 광산김씨의 세거지가 있다.

예전에는 금광2동에 43가구가 살았는데, 광산김씨가 15호 살았다. 도시화가 되면서 인구가 다량으로 유입되었다. 남향받이 동네로 예부터 살기 좋은 동네였다. 앞쪽으로 현재의 큰길은 원래 개천이었고 주위에 논이 있고 위쪽 언덕에는 밭이 많이 있었다. 비교적 많은 사람이 사는 마을로 개인 주택이 많았다. 즉 대지가 많았다는 것이다. 대지는 100% 환지해주었기 때문에 도시계획이 되지 않았다. 성남시에서 가장 도로가 꾸불꾸불하고 바르지 못한 마을이다. 이는 개인 주택을 그대로 인정해주어서 전답은 도시계획을 할 수 있는데, 대지쪽은 할 수 없었다. 주택가에 아주 큰 집들이 있는데 길이 좁고 불편하다. 대지가 넓어 후에 큰 집을 고층으로 지었는데 차가 드나드는 도로는 엉망이다.

도시개발 전 마을의 산업은 논농사, 밭농사가 함께 이루어졌다. 현재의 도로변에는 원래 개천으로 논농사가 행해지고, 비탈진 언덕 쪽에는 밭농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여기 금광동에서 나는 담배가 유명한데, ‘금광초(金光草)’라 하여 향이 특이했다고 한다(국문학자인 전 건국대학교 교수였던 이훈종 박사께서 말씀하심). 지역이 좁기 때문에 많은 양을 생산한 것은 아니었다. 시장은 현재 단대시장단대오거리역 부근에 있다.

인접한 마을로는 남쪽으로 금광1동, 북쪽으로 은행1동, 서쪽으로 단대동이 있다. 교통편은 신흥동 쪽 고개를 넘어 복정동으로 나가 버스를 이용했다. 옛날에는 도보 이용로로 현재 단대오거리에서 복정동으로 송파를 거쳐 광진교를 건너 서울 가고, 광주로 가는 길은 상대원고개를 넘어간다. 단대오거리가 주막거리로서 술집이 있고 쉬어가는 곳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길손들이 술도 마시고 밥도 사먹는 음식점이 있어 교통의 요지가 되었던 곳이다. 복정사거리는 세곡동 쪽으로 수원으로 가고, 또 모란 쪽으로 해서 돌마면, 용인 등지로 갔다.

금광2동은 토지가 많고 남향이라 주택이 많았으며, 금광1동은 원래 산이고 음지라 사람이 살지 않았다. 지금은 도시화로 산지나, 농토도 모두 주택이 들어서 옛날에 주거지가 많았던 곳을 분간하지 못한다. 단대천이 서쪽으로 흐르고 있어 현재는 수정구와 구분하는 경계가 되었으나 복개되어 하천이었음을 구분하지 못한다. 복개로 인하여 전국에서 가장 넓은 도로가 형성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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