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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1568
한자 柳季聞
이칭/별칭 숙행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연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생년 1383년연표보기
몰년 1445년연표보기
본관 문화
대표관직 수운판관

[정의]

조선 초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숙행(叔行)이다. 우의정 유관(柳寬)의 아들이다. 아버지인 유관은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그의 가문은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훈구가문(勳舊家門)이었다.

[활동사항]

생원으로 1408년(태종 8)의 식년시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문한관(文翰官)을 역임하고, 이조정랑·의정부사인을 거쳐 1423년(세종 5)에 판사재감사 겸 지형조사(判司宰監事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으로서 야인추장 童猛哥帖木兒를 회유하여 조선 측의 제의를 관철시켰다.

사간원우사간이 되었으나, 공물을 수탈했다는 이유로 일시 파면되었다가 우의정이었던 아버지의 후원으로 재서용되었다. 1426년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외직에 나갔다가 곧 소환되어 이조참의·형조참판 등을 거쳐 1430년 대사헌이 되었다.

강원도도관찰사·한성부윤을 거쳐 1437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다시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는데, 강원도도관찰사 재직시의 비행에 의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중재로 무마되었다.

인수부윤(仁壽府尹), 호조참판, 판한성부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443년 개성부유수에 임명되었는데, 2년 후 왕의 행궁에 문안을 가던 도중 영성역(迎曙驛) 부근에서 갑자기 죽었다.

[학문과 사상]

그는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글씨를 잘 썼다. 태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안지(安止), 최석효(崔興孝) 등과 함께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쓰기도 하였다.

대간으로서 불교와 주자가례 등 당시 사회의 병폐를 많이 개선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점차 직책에 대한 성실함이 없어졌고, 뇌물을 받는 등 자주 탄핵을 받아 파면되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안숙(安肅)이다.

[묘소]

묘소는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산20의 속칭 안골에 있는데 양원군 이희 묘 위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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