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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1590
한자 尹而烈
영어공식명칭 Yun Yiyeol
이칭/별칭 위로(渭老)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오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생년 1765년연표보기
몰년 1821년연표보기
본관 해평(海平)
대표관직 동도참군

[정의]

조선 후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위로(渭老). 해평윤씨 20세손. 장주공파(長洲公派). 아버지는 윤익동(尹翼東)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할아버지는 윤득태(尹得泰), 증조부는 윤진(尹津)이다. 부인은 전주이씨이며, 슬하에 2남을 두었다. 부인이 죽은 뒤에 인동장씨, 안동권씨를 맞아들였다. 근친 가운데에는 계부 윤형동(尹衡東)이 역시 무과출신으로 무산부사를 역임한 것이 전부이다.

[활동사항]

정시(庭試)무과 출신으로 동도참군(東道參軍)를 역임하였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액외금군(額外禁軍)이었던 그가 1798년(정조 22) 3월 무과 복시(覆試)에 참여하였는데 시험관의 잘못으로 자신이 합격자 명단에서 누락되었다고 하여 대궐에 난입한 일이 수록되고 있다. 당시 그는 진술에서, 무과의 복시에서 활을 쏘아 맞춘 것이 모두 팔십일분반 사보(八十一分半四步)이었으나 합격이 되지 못했는데, 방목(榜目)을 보니 팔십일분반 일보인 자가 합격이 되었다. 그래서 시책(試冊)을 가져다 보니 그가 기추(騎芻)에서 두 번 맞춘 것을 한 번 맞춘 것으로 개서(改書)하였으므로, 이를 시관(試官)에게 호소하였으나 응답하지 않기 때문에 대궐을 함부로 난입한 죄를 범하기에 이르렀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정조는 과거시험이 엄격하게 진행되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조사와 문책을 지시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호창관(呼唱官)의 실수로 드러났다. 최종적으로 그는 이미 곤장을 맞은 상태에서 파면이라는 가벼운 징계에 처해졌고, 문제를 일으킨 고관(考官)과 감시관은 파직하고 참고관은 무거운 쪽으로 추고하도록 하였다.

[묘소]

묘는 수정구 복정동 산71번지에 있다. 복정동해평윤씨의 세거지이다. 홍천현감을 지낸 윤경지(尹敬之)[1604-1659]가 이곳에 최초로 정착한 것으로 전해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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