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2329
한자 婚禮服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성남시
집필자 주영하

[정의]

혼례 때 입는 옷.

[개설]

1960년대 이전까지 성남에 살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혼례를 집에서 행했다. 따라서 오늘날 이른바 ‘전통혼례’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신부의 집에서 치렀다. 이때 신랑은 사모관대를 입었고, 신부는 원삼과 족두리를 걸쳤다. 이들 옷은 보통 마을에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혼인계가 있는 마을의 경우, 이 옷을 보관하면서 마을 규모에서 혼인을 도와주었다.

[사례]

분당구 운중동에 사는 조묘령씨의 경우 전통적인 혼례복을 잘 기억하고 있다. 조묘령[1909년생]씨는 19살이었던 1928년에 혼인을 했다. 혼례 며칠 전에 집안의 나이가 많고 복이 많은 여자가 신부에게 얼굴에 난 솜털과 눈썹을 가지런히 뽑게 해줬다. 혼례 날은 빨간색 물감[주사(珠砂)]으로 이마와 볼 양쪽에 연지 곤지를 찍었다. 머리는 귀밑머리를 풀고 낭장머리를 했다. 낭자머리에 비녀를 꽂고 족두리를 썼다. 족두리 앞에는 양쪽으로 댕기를 비녀에 걸어서 드리우고 뒤에는 큰 댕기를 드렸다. 머리에 족두리·비녀·댕기를 한 후 분홍색 치마에 노란색 저고리를 입고 겉에는 초록색 원삼을 입었다. 혼례 날 입는 치마와 저고리는 시댁에서 예물로 보내온 것으로 했다. 신은 타래버선에 수놓은 당혜를 신었다.

신랑은 속에는 바지, 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겉에는 사모관대를 입었다. 백색 버선에 흑색 목화를 신었다. 사모관대는 마을에 공동으로 준비한 것을 빌려 입었던 것이다. 대례는 안산의 신부 집에서 거행했고, 그 다음날에 가마를 타고 곧장 시댁으로 왔다. 제보자가 준비한 혼수품에는 시댁에 드려야 한 예물과 신부 자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이 있었다. 시댁에 드리는 예물은 주로 버선류였다. 제보자가 버선 몇 죽(1죽=12컬레)을 미리 준비하였다. 본인이 쓰는 물건은 주로 입을 옷과 침구류와 장롱 및 바느질 용구 등이었다. 제보자가 시집올 때 가져왔던 이층장 장롱은 지금까지 집안에 남아 있다.

이용학[1932년생] 씨의 여동생은 1942년생으로 1960년대 중반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혼례를 했다. 혼례 때 빨간색 물감으로 이마와 볼 양쪽에 연지와 곤지를 찍었다. 머리는 낭장머리를 했고 위에 화관을 얹었다. 낭자머리에 큰 용비녀를 꽂고 양쪽으로 ‘앞드림댕기’를 비녀에 걸어서 드리우고 뒤에는 ‘큰 댕기’를 드렸다. 손에는 손을 가리기 위해 하얀색 옷감을 길게 만들어서 드리웠다. 그리고 치마와 저고리 위에 원삼을 입었다. 원삼의 소매에는 색동을 달려 있고 수구(袖口)에 한삼을 붙였다. 신랑은 머리에 남바위를 쓰고 위에 사모를 썼다. 옷은 안에 하얀 색 중단을 입고 겉에는 관복을 입었다. 허리에 대를 매고 손에 하얀 장갑을 끼었다. 그리고 목화를 신었다.

이성자[1929년생] 씨의 경우에도 전통 혼례를 하였다. 혼례의 대례는 친정집에서 거행했다. 분홍치마와 노랑저고리를 입고 머리는 쪽진 머리를 했다. 치마와 저고리는 모두 본인이 직접 만든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가 되면 혼례식 자체가 집안에서 예식장으로 완전히 옮겨갔다. 이성자 씨의 맏아들은 1958년에 태어났고, 1986년에 결혼을 하였다. 맏아들의 혼례는 예식장에서 거행했다. 신랑은 양복에 구두를 신었다. 양복 안에는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었다. 신부는 하얀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면사포를 썼다. 웨딩드레스는 예식장에서 빌린 것이다. 신부의 머리에는 꽃을 꽂고 손에는 장갑을 끼고 부케를 들었다. 하객들 중에 남자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보통 바지와 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었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양복을 입었다. 여자 하객들은 대부분 한복을 입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