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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2673
한자 高麗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이상훈

[정의]

936년 후백제 멸망 이후부터 1392년까지 고려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경기도 성남 지역 역사.

[개설]

성남은 후삼국시대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 지역으로 궁예의 태봉에 속하였다가 왕건의 고려에 귀속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 정치 군사적으로 중시되어 온 곳 가운데 하나였다.

[행정구획 변천]

성남 지역이 속해 있던 한주를 940년(태조 23) 광주(廣州)로 바꾸고, 983년(성종 2) 12목의 하나인 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995년(성종 14) 12주 절도사를 둘 때는 봉국군절도사(奉國軍節度使)로 고쳐 관내도(關內道)에 소속시켰으며, 1012년(현종 3)에는 절도사를 폐하여 안무사(按撫使)를 두었다가 1018년 12목을 줄여 8목으로 고칠 때 광주목으로 되었다. 이때 전국을 5도 양계로 나눌 때 광주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관할하는 양광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310년(충선왕 2)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 목으로 복구되었다. 이 같이 볼 때 성남 지역이 속해 있던 광주는 군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주요 역할을 담당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제 생활]

고려시대 성남 지역 주민들의 생활 기반은 농업이었다. 특히 성남이 속해 있던 광주 지역 인근에는 고려 후기에 발달한 농장이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고려사』와 같은 당시의 사료에 의하면 가뭄, 지진 등 자연 재해로 인해 주민들이 많은 고충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광주목조의 내용을 보면 광주 지역에서는 느타리버섯이나 은구어, 그리고 양질의 도자기가 상공으로 올려졌음을 알 수 있고, 공민왕 대에 이득림(李得霖)광주에서 공물로 올리는 명주를 중간에 착복하는 사례로 미루어 보아 별공으로 명주를 바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남 지역의 대외 항쟁]

성남 지역은 몽고와의 항쟁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몽고는 1231년(고종 18) 1차 침입부터 1270년(원종 11)까지 30여 년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였다. 몽고군의 침략 때마다 전략적 요충지였던 광주는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다. 특히 1232년(고종 19) 살리타[撒禮塔]가 이끄는 몽고군의 2차 침입 때 목사 이세화(李世華)의 지휘 아래 지역 주민들이 일장산성(현재의 남한산성)에 들어가 산성을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약 2개월 동안 이어진 공격을 막아내어 몽고군은 결국 광주를 포기한 채 남하하여 처인성을 공격하다가 살리타가 죽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 승리로 광주는 요역과 잡역을 면제받는 특전을 누렸다.

[대표적 인물]

성남 지역은 비록 왕건 사후에 반역하였지만 통일 과정까지 든든한 후원 세력이었던 왕규(王規)의 기반이 이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규광주의 호족으로 두 딸을 태조의 왕비로 들여보내 제15·16왕비가 되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혜종 때 반란을 일으켜 거세되었다.

고려 말 정치 개혁을 주도한 집단인 신흥사대부 가운데 성남 지역과 관련이 깊은 인물은 이집(李集)이다. 이집광주이씨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공민왕신돈의 미움을 사 도피하였다가 신돈이 주살된 이후 판전교시사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그는 사직하고 시를 지으며 자연에 묻혀 살았고,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또한 광주안씨인 안성(安省)은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직학사를 거쳐 상주판관이 되어 청렴한 이름을 떨쳤고, 조선 건국 후 참지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충절을 지킨 충신으로 김약시(金若時), 조견(趙絹), 김자수(金自粹)와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특히 김약시광산김씨로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여 진현관 직제학에 이르렀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광주의 산곡간(山谷間)[현 신구대학]에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는데, 인근 주민들이 광산김씨가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금광리라 불렸고, 현재 금광동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단대동 역시 충절[丹]을 지킨 분이 거주하는 곳[垈], 즉 붉은 텃골[丹垈]에서 유래되어 단대리로 불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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