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0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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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 |
영어음역 | Uibyeong |
영어의미역 | Righteous Arm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강윤정 |
[정의]
1894년에서 1909년 사이 안동 지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나섰던 자위군.
[개설]
한국 독립운동은 1894년부터 1945년까지 약 51년 동안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첫 장을 장식하는 활동이 바로 의병 항쟁이다. 의병 항쟁은 1894년부터 3·1운동 직전인 1909년 말까지 펼쳐졌는데 연구자들은 그 특성에 따라 3시기, 4시기, 5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또 전기의병(1894~1896), 중기의병(1904~1907. 7), 후기의병(1907. 8~1909)으로 시기를 구분하는 연구자들도 많다. 안동의병은 전기의병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중기의병과 후기의병에서는 약한 편이었다. 특히 안동의병은 유교적인 충의 정신에 바탕을 둔 유생층이 중심을 이루었고, 일본의 공격에 대한 반외세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전기의병]
전기의병은 1894년에 일어난 의병으로 갑오의병이라고도 한다. 갑오의병은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탈하여 국권을 무너뜨리고 왕실을 농락한 갑오변란(甲午變亂)에서 비롯되었다.
안동 지역에서는 서상철(徐相轍)이 경복궁이 유린되고 고종이 핍박당하자 분기하여 격문을 발송하고, 1894년 7월 안동향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 기병은 안동부에 의해 저지되었으나 서상철은 계속 의병을 모집하여 8월초 안동 일대에서 2,000여 명 규모의 의진을 결성하여 상주의 태봉에 있던 일본군 병참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서상철의 안동의병은 한말 의병항쟁사에서 첫머리를 장식한 투쟁이라는 데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갑오의병에 이어 이듬해인 1895년 말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공포 소식을 들은 안동의 유림들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니 곧 을미의병이다. 이 시기의 안동의병은 정재학파(定齋學派)를 중심으로 하여 그 문인들이 의병에 다수 참여한 것이 특징이다. 을미의병 시기에 안동 지역에서는 안동부의 안동의진과 예안의 선성의진 두 개의 의병 부대가 조직되었다.
김도화가 이끄는 안동의진과 이중린이 이끄는 선성의진은 1896년 3월 말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여러 의병 및 서상렬(徐相烈)이 이끄는 제천의병과 연합 의진을 형성하였다. 연합 의진은 곧 상주 태봉에 주둔하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의 총공격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태봉 전투의 승세를 타고 인근의 의병 진압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동부의 민가 1,000여 호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안동의진과 선성의진은 일본군이 물러난 후 의진을 정비하고 다시 싸울 준비를 하였으나 태봉 전투 패전 이후, 특히 안동이 불바다가 된 이후에 인적·물적 자원의 부족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거기에다 고종은 거듭하여 암행효유사를 파견하여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결국 안동의진과 선성의진은 9월에 이르러 9개월에 걸친 을미년·병신년 항전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중후기의병]
중기의병으로 구분되는 시기는 1904년부터 1907년 7월 말까지이다. 러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강제로 체결된 제1차 한일협약으로 조선이 준 식민지 상태가 되자 이에 맞서 의병이 일어났고, 특히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직 관료와 유생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후기의병은 일본이 한국군을 해산하는 1907년 8월 1일부터 1909년까지이다. 중기의병을 계승한 후기의병은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이 기폭제가 되었고, 해산 군인·유림·농민·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에서 참가하여 전면적인 항일 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중후기의병 시기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 지도자로는 이상룡·박인화·배선한·류시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외에도 김수락·강재천·권용길·김주봉·남준이 등이 소규모 부대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특징]
1894년부터 국권을 빼앗긴 1909년을 전후한 시기에 지속적으로 항쟁한 안동의병은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첫째, 안동의병은 임진의병의 정신을 계승하여 봉기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대장 김해(金垓)는 1592년 6월 예안·안동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금응훈(琴應壎)·이숙량(李叔樑)·김윤명(金允明)·이정백(李庭栢)·배용길(裵龍吉) 등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도 초유사와 순찰사에 임명되어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 순국하였고, 류성룡(柳成龍)은 병조판서와 영의정으로서 선조를 도와 왜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안동 지역 유림의 이 같은 의병 활동의 전통이 구한말 안동의병으로 이어진 것이다.
둘째, 안동의병은 정재학파를 중심으로 하여 그 문인들이 의병에 다수 참여하였다. 안동의병은 1895년 12월 봉기하여 이듬해 6월 해산하기까지 권세연(權世淵) 의병장 체제에서 김도화(金道和) 의병장 체제로 개편하면서 정재학파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의진을 구성하여 투쟁을 이어 갔다.
셋째, 안동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유생 집단이었지만 양반 유생 외에도 아전들까지 합세하였다. 아전들이 「안동하리통문(安東下吏通文)」을 작성하여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한 점은 특히 눈에 띈다. 넷째, 전기 안동의병은 관군과의 전투는 물론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는 전기의병의 일부가 시위적인 성격을 띠었던 점과는 달리 안동의병이 강력한 전투 의진이었음을 말해 준다. 다섯째, 안동의병의 결과 안동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다. 태봉 전투 후 안동의병을 추격하던 일본군은 안동 지역을 의병의 소굴이라 하여 민가 1,000여 호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여섯째, 안동의병의 항전은 국권을 빼앗긴 후에 독립운동으로 계승·발전되었다. 향산 이만도 등 여러 명이 자결로써 독립을 외쳤고, 김동삼·이상룡 등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전쟁에 목숨을 바치며 투쟁한 수많은 항일 지도자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는 곧 안동의병의 이념적 발현의 결과로서 안동시가 전국 시군 가운데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