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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401274
한자 金玏
영어음역 Gim Reuk
이칭/별칭 희옥(希玉),백암(栢巖),민절(敏節)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황만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북도 영천시
성별
생년 1540년(중종 35)연표보기
몰년 1616년(광해군 8)연표보기
본관 예안
대표관직 대사성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 증조부는 김만칭(金萬秤), 할아버지는 김우(金佑), 아버지는 진사 김사명(金士明)이다. 큰아버지 형조원외랑 김사문(金士文)에게 입양되었다.

[활동사항]

김륵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76년(선조 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78년 검열, 전적을 거쳐서 예조원외랑(禮曹院外郞), 정언이 되었다. 1580년 전적겸서학교수가 되고 홍문록(弘文錄)에 등록되었고, 이듬해 부수찬, 지평, 직강 등이 되었다.

1584년 영월군수로 갔을 당시 신임 군수마다 죽임을 당하는 변이 있었는데 김륵노산군(魯山君, 단종)의 묘를 배알한 후 제청(祭廳), 재실(齋室), 찬청(饌廳)을 묘 옆에 짓고 처음으로 ‘노산군’이라는 호칭을 신주에 써서 비(妃) 송씨(宋氏)의 신위와 함께 모셔 변을 막았다. 3년 후에 돌아와 선조로부터 많은 치하를 받고 교리에 서용되었다.

1590년 집의, 사간, 검열, 사인, 사성, 사복시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형조참의를 거쳐 안동부사가 되었다가 경상도안집사(慶尙道安集使)로 영남에 가서, 충성스럽고 의기 있는 선비들에게 국가의 뜻을 알리고 왜적을 토벌하도록 장려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 이듬해 경상우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전라좌·우도의 곡식을 운반해 기근이 든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이어 도승지, 대사간, 한성부우윤, 대사성을 거쳐 1594년 동지의금부사, 이조참판,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대사헌이 되어 「시무16조」를 상소했는데 모두 치안에 좋은 대책이라는 평을 들었다. 1599년 명나라 장수를 접반하고 형조참판에서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612년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명군이 조선에 남아 있는 것처럼 꾸며 일본의 재침략을 막아 달라는 청을 올리고 명으로부터 일본에게 재침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칙서를 보내게 하고 돌아왔다.

대사성이 되고 안동부사로 나가 범람하는 낙동강의 재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수축해 후세에까지 칭송을 들었다.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과 앞서 광해군의 생모 공빈김씨(恭嬪金氏) 별묘(別廟)의 의물(儀物)을 종묘(宗廟)의 의물과 똑같게 하는 것에 반대한 일까지 연루되어 강릉으로 유배가게 되었다가 여러 대신들의 변호로 풀려났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백암집(栢巖集)』 6권 5책이 있다. 문집 중 임진왜란 이전의 소문(疏文) 중 「영월군진폐소(寧越郡陳弊疏)」는 영월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85년 초(草)한 4,900자에 달하는 장편으로 영월의 극도로 조폐(凋弊)한 상황을 역진(歷陳)하고 시급히 국가가 나서서 구휼해야 함을 강조했다.

1595년 부제학으로 있을 때 초(草)한 몇 편의 「처치양사차(處置兩司箚)」는 정철(鄭澈) 사후 1년 최영경(崔永慶)의 죽음을 싸고 벌어진 신구(伸救)와 구쇄(構殺)의 격론 와중에 신원을 주장한 것으로 이 사건에 관한 연구에는 필수불가결의 자료이다. 1595년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초(草)한 「사헌부진시무차(司憲府陳時務箚)」는 7,600자에 달하는 장편으로 임진왜란 후의 부흥책을 논하여 선조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글이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운계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민절(敏節)이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영천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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