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4016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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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林 |
영어음역 | Ryu Rim |
이칭/별칭 | 화종(花宗),단주(旦州),월파,유림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계곡리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강윤정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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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계곡리 |
성별 | 남 |
생년 | 1894년 |
몰년 | 1961년 |
본관 | 전주 |
대표경력 | 임시정부 국무위원 |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
[활동사항]
본관은 전주. 초명은 화종(花宗), 호는 단주(旦州)와 월파(月坡)이다. 1894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계곡리에서 류이흠(柳頤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류림은 안동의 내앞마을에 설립된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다녔다. 졸업 후 1915년 정진탁과 함께 대구에서 부흥회(復興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17년에는 김용하(金容河)와 함께 자강회(自彊會·自强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류림은 안동 지역의 임동면 편항시장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류림은 가족들과 함께 봉천성(奉天省, 현재 지린성) 요중현(遼中縣)으로 망명하였다. 요중현에 도착한 류림은 가족을 남겨둔 채 남만주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로 이동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여름 무렵 류림은 다시 상해로 유학을 떠났고, 북경을 오가며 신채호(申采浩), 김창숙(金昌淑) 등과 교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류림은 점차 아나키스트로 전환하던 신채호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뜬 류림은 1922년 중국의 성도(成都)로 유학을 갔다. 성도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어와 에스페란토어 등 다양한 외국어를 습득하였다.
1926년 초 대학을 졸업한 류림은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앞으로의 항일투쟁 방향을 모색하던 류림은 신민부(新民府)를 찾아 김좌진과 공동노선을 모색해 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류림은 국내의 아나키즘 운동에 커다란 관심을 두었고, 1929년 10월 23일 평양에서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1929년 11월 평양에서 열릴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全朝鮮黑色社會運動者大會)를 준비하던 류림은 1929년 11월 7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류림은 연일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으나 일본 경찰은 그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찾아내지 못하고 봉천으로 추방하였다.
1930년 말부터 류림은 봉천에서 의성숙(義誠塾 혹은 의성학원, 봉천중학)을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류림은 1931년 10월경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5년형을 선고받아 1937년 10월 출옥할 때까지 모두 6년의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류림은 곧 2차 망명길에 올랐다. 연안을 거쳐 중경으로 건너간 류림은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대표로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42년 10월 20일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2년 2월 16일 외교위원회의 연구위원이 되었고, 이어서 4월에는 조소앙(趙素昻) 및 신익희(申翼熙) 등 14명과 함께 임시정부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4년 4월에는 국무위원이 되었고, 1945년 12월에 임시정부 요인으로서 입국하였다. 이후 독립노동당(獨立勞動黨)을 창당하여 그 대표가 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