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6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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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奇遵 |
영어공식명칭 | Ki Jun |
이칭/별칭 | 자경(子敬),복재(服齋),양덕(陽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강경윤 |
출생 시기/일시 | 1492년 - 기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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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16년 - 기준 저작으로 천문이습관을 겸함 |
활동 시기/일시 | 1519년 - 기준 기묘사화로 하옥되고 아산으로 정배 |
활동 시기/일시 | 1520년 - 기준 아산에서 온성으로 이배 |
활동 시기/일시 | 1521년 - 기준 신사무옥으로 유배 |
몰년 시기/일시 | 1521년 - 기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45년 - 기준 이조판서에 추증 |
추모 시기/일시 | 1668년 - 기준 인산서원에 추배 |
묘소|단소 | 기준 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460번지 |
사당|배향지 | 인산서원지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 |
사당|배향지 | 충곡서원지 - 함경북도 온성군 온성면 동화동 |
사당|배향지 | 문봉서원지 - 경기도 고양시 문봉동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행주 |
대표 관직|경력 | 시강관 |
[정의]
조선 전기 기묘사화 때 충청남도 아산으로 유배되었으며, 인산서원에 제향되었던 문신.
[개설]
기준(奇遵)[1492~1521]은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사람으로 조광조(趙光祖)를 위시하여 김식(金湜), 김정(金淨) 등과 함께 하옥되고 아산으로 정배(定配)[죄인을 지방이나 섬으로 보내 정해진 기간 동안 그 지역 내에서 감시를 받으며 생활하게 하던 일]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온성[현재 함경북도 온성군]으로 이배(移配)되었다. 기준이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추배(追配)된 것은 이와 같이 한때 아산에서 유배 생활을 하여 아산의 향유(鄕儒)들이 경모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가계]
기준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양덕(陽德),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기준의 아버지는 응교(應敎)을 지낸 기찬(奇禶)이며, 어머니는 김수형(金壽亨)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부인은 우찬성(右贊成)을 지낸 윤금손(尹金孫)의 딸인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활동 사항]
기준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1513년(중종 8)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거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으며, 박사(博士)를 역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16년(중종 11) 저작(著作)으로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을 겸하였으며 검토관(檢討官), 수찬(修撰), 검상(檢詳), 장령(掌令), 시강관(侍講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 14) 응교(應敎)가 되었는데, 마침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를 위시하여 김식, 김정 등과 함께 하옥되고 이어 아산으로 정배되었다가 이듬해 죄가 가중되어 다시 온성으로 이배되었다. 온성으로 이배된 사유는 기준이 아산 유배 중 기준의 형인 기형(奇逈)이 무장현감이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부임하다가 직산현[현재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을 지나게 되었는데, 직산이 아산과의 거리가 멀지 않았으므로 기준이 아산현감 배철중(裵鐵重)에게 간청하여 직산까지 가서 어머니를 뵙고 함께 숙박한 후 돌아온 것이 논죄된 것이다. 그 후 기준은 어머니 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갔다가 1521년(중종 16)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신사무옥(辛巳誣獄)이 터져 다시 유배지에 가서 교살(絞殺)되었다.
[학문과 저술]
『복재집(服齋集)』, 『무인기문(戊寅紀聞)』, 『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묘소]
기준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460번지에 있다. 부인 파평윤씨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묘비, 상석, 향로석, 문인석, 무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기준은 1545년(인종 1) 신원(伸冤)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668년(현종 9) 인산서원에 추배되었으며,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과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