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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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玉均 |
영어공식명칭 | Kim Okgyun |
이칭/별칭 | 백온(伯溫),고균(古筠),고우(古愚),충달(忠達)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만정 |
출생 시기/일시 | 1851년 1월 23일 - 김옥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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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861년~1866년 - 김옥균 강릉 송담서원에서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872년 - 김옥균 알성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874년 - 김옥균 홍문관교리에 임명 |
수학 시기/일시 | 1882년 - 김옥균 일본 3차례 시찰 |
활동 시기/일시 | 1882년~1883년 - 김옥균 승정원우부승지, 이조참의, 호조참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884년 - 김옥균 갑신정변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885년 1월 - 김옥균 일본으로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886년 8월 - 김옥균 일본 오가사와라섬으로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888년 7월 - 김옥균 일본 삿포로로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890년 - 김옥균 해배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 3월 - 김옥균 중국으로 건너감. |
몰년 시기/일시 | 1894년 3월 28일 - 김옥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94년 12월 27일 - 김옥균 사면 복권 |
추모 시기/일시 | 1910년 6월 30일 - 김옥균 규장각대제학, 시호 충달 추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2년 12월 3일 - 김옥균선생유허 조성 |
출생지 | 충청남도 공주시 정안면 |
거주|이주지 | 서울특별시 |
학교|수학지 | 송담서원 -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송담서원길 27-7[강동면 언별리 1115] |
활동지 | 일본 |
묘소 | 김옥균선생유허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고균길 41[아산리 494-2] |
성격 | 정치인|개화운동가 |
성별 | 남 |
본관 | 안동(安東) |
대표 경력 | 이조참의|호조참판 |
[정의]
조선 후기 개화파의 지도자로 충청남도 아산 지역에 묘와 제실이 있는 정치인.
[개설]
갑신정변의 주역이며 반역범으로 암살당했으나 복권되어 충달(忠達)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가계]
김옥균(金玉均)[1851~1894]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고우(古愚)이다. 1851년(철종 2) 1월 23일 충청도 공주 정안면[현재 공주시 정안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병태(金炳台)이고,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이다. 7세 때 천안에 사는 당숙 김병기(金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1세 때인 1861년(철종 12) 김병기가 강릉부사(江陵府史)로 가게 되자, 16세까지 강릉 송담서원에서 율곡(栗谷) 학풍의 영향을 받았다.
[활동 사항]
1. 아산군수였던 양자가 아산에 묘소를 만들다.
1872년(고종 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후 1874년(고종 11)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1884년(고종 21) 12월 4일 김옥균 주도로 일으킨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1894년(고종 31) 3월 28일 중국 상하이에서 암살당하였다. 시신은 4월 12일 국내로 이송되었고, 서울 양화진(楊花津)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이때 김옥균을 존경한 일본인 사진사 카이군지[甲斐軍治]에 의해 시신 머리[또는 머리카락]가 수습되었다고 하며, 4월 24일 일본 도쿄 진정사(眞淨寺)라는 절에서 법요식 이후 유품으로 묘소를 만들었다. 다른 묘는 도쿄 아오야마[靑山] 공원묘지의 외국인 묘역에 있는데, 묘비는 김옥균의 양자인 김영진(金英鎭)이 1904년(고종 41) 유길준(兪吉濬)의 비문을 받아 세웠다. 김영진은 족보에 별도의 생부[김완규]가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총독(朝鮮總督)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칙임관(勅任官) 대우(待遇)]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김옥균의 아들로 일본 부인이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김옥균은 친일 내각이 수립되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분위기 속에서 1894년 음력 12월 27일 사면 복권되었으며, 1910년(순종 4) 6월 30일 규장각대제학(奎章閣大提學), 시호 충달이 내려졌다. 1912년 12월 3일 당시 아산군수로 재직하였던 김옥균의 양자 김영진이 일본 정부와 친일파 유혁로(柳赫魯)의 도움을 받아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의 산기슭에 묘를 조성하였는데, 옷과 머리카락만 가지고 조성한 이른바 ‘의발묘(衣髮墓)’이다. 1914년 9월에 김옥균의 부인 기계유씨(杞溪兪氏)가 죽자 합장하였다. 김옥균의 묘와 제실이 있는 김옥균선생유허(金玉均先生遺墟)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2. 파란만장한 조선 후기의 풍운아
1880년대 들어 조선 정부가 개화정책을 실시하자 김옥균은 개화파로서 활약하였다. 1882년(고종 19)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상황에 영향을 받았다. 임오군란 이후에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이조참의(吏曹參議), 호조참판(戶曹參判) 등 요직을 거쳤다. 김옥균은 1882년 9월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 일행의 고문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서 차관을 얻는 교섭을 하고 1883년(고종 20) 3월에 돌아왔다. 1883년 6월 고종의 신임장을 가지고 3차로 일본에 건너가 차관 교섭을 했지만, 반대파로 인해 실패하고 정계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 영향력 아래에 민씨 척족(戚族) 세력이 개화파를 정계에서 축출하기 시작하자 변법(變法)을 준비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다. 개화파 일부 군사와 일본군을 동원하여 민태호(閔台鎬), 민영목(閔泳穆) 등 민씨 일파의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김옥균은 호조참판(戶曹參判)을 맡아 개혁 정책을 공포했으나, 이틀 후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굳건한 지지 세력 없이 청나라 군대에 대한 과소평가와 일본 지원을 과대평가한 결과였다.
김옥균은 정변이 실패하자 박영효,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생활은 1885년(고종 22) 1월부터 1894년 3월 암살되기 전까지 이어졌다. 일본은 반역범 송환을 요구하는 조선의 요구를 거절하면서도 이용가치가 떨어진 김옥균을 귀양 보냈다. 1886년(고종 23) 8월 일본 본토에서 남으로 약 1,000㎞ 떨어진 서태평양에 있는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 1888년(고종 25) 7월 북쪽 북해도 삿포로[札幌]에 각각 유배시켰으며, 1890년(고종 27) 가을에야 해배(解配)하였다.
3. 암살과 능지처참, 복권과 시호를 받다.
1890년 해배된 뒤 도쿄로 돌아와 머물던 김옥균은 1894년 3월 청나라 이홍장(李鴻章)과 담판을 벌이려는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로 넘어갔으나 조선 정부에서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당하였다. 청나라에 의해 국내로 이송된 시신은 서울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된 후 목은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으로 효시되었다. 어머니와 누이는 자결하였고, 아버지는 감옥에 갇혔다가 1894년 음력 4월 26일 처형되었다.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대구감영에 투옥되었다가 옥사하였다. 부인 기계유씨는 숨어 지내다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던 일본군에 의해 1894년 12월 충청도 옥천군에서 발견되어 한양으로 호송된 후 노량진 친가에서 살다가 양자 집에서 생을 보냈다. 김옥균은 김병기 집안에게 파양(罷養)되었으나 복권된 후 1895년(고종 32) 3월 17일 다시 입양이 계승되었다.
김옥균에게 시호가 내려진 1910년에는 김옥균의 서울 옛집에서 김영진과 황족(皇族), 일본인 등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김옥균 추존 사업은 친일파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기화근사(箕和近事)』, 『치도약론(治道略論)』, 『갑신일록(甲申日錄)』이 있다.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494-2에 김옥균선생유허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