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7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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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馬銅 |
영어공식명칭 | Lee Madong |
이칭/별칭 | 청구(靑驅)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형열 |
출생 시기/일시 | 1906년 5월 1일 - 이마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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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5년 - 이마동 휘문고등보통학교 편입 |
수학 시기/일시 | 1927년 - 이마동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57년 - 이마동 대한미술협회 회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63년 - 이마동 홍익대학교 교수 재직 |
활동 시기/일시 | 1972년 - 이마동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훈 |
활동 시기/일시 | 1975년 - 이마동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
몰년 시기/일시 | 1981년 - 이마동 사망 |
출생지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
성격 | 화가 |
성별 | 남 |
본관 | 연안(延安) |
대표 경력 | 대한미술협회 회장|홍익대학교 교수 |
[정의]
일제강점기 이후 현대 시기에 활동한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서양화가.
[개설]
이마동의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청구(靑驅)이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업학교에 다니다가 1915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으며, 고희동(高羲東)[1886~1965]과 이한복(李漢福)[1897~1940]의 지도를 받아 미술계로 들어선 서양화가이다.
[활동 사항]
이마동(李馬銅)[1906~1981]은 1906년 5월 1일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에서 출생했다. 여러 학교에서 그림을 가르치던 고희동(高羲東)[1886~1965]과 이한복(李漢福)[1897~1940]의 지도를 받아 미술계로 들어섰다. 1923년에는 고려미술원에서 이종우(李鍾禹)[1899~1979]로부터 데생과 유화 기법을 배웠다. 1927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들어가 사실주의 화가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1867~1943]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 유학 당시 조선미술전람회 7회[1928], 8회[1928]에 특선하였고, 귀국 후인 13회[1934]에도 입선하였다.
1932년 졸업 이후 동아일보사의 미술기자가 되었으며, 연재소설 삽화를 그리거나 미술 관계 기사를 썼다. 1934년 한국인 서양화가들의 모임인 목일회(牧日會)에 참가했다. 1936년 신의주공립상업학교, 신의주여자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8년 사직하고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1939년부터 1961년까지 보성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조선미술건설본부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출품하였다. 6·25전쟁 당시 종군화가단 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57년에는 대한미술협회 회장이 되었다. 1963년에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고, 1971년 정년퇴직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고, 1981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마동의 대표작으로는 「꽃다발 있는 정물」, 「교회 보이는 풍경」, 「흑석동 풍경」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이마동은 1963년에 서울시문화상, 1972년에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1975년에는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