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100803
한자 徐容吉
영어공식명칭 Seo Yonggil
이칭/별칭 일창(一滄)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충청남도 아산시 탕정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홍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2년 8월 6일연표보기 - 서용길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3년 - 서용길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서용길 배재중학교 교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8년~1950년 - 서용길 제헌국회 국회의원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서용길 사망
출생지 충청남도 아산군 탕정면
학교|수학지 온양공립보통학교 -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
학교|수학지 사립 배재중학교 - 경기도 경성부
학교|수학지 연희전문학교 -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
학교|수학지 교토제국대학 - 일본 교토
활동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강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제헌국회 국회의원 - 서울특별시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선영
성격 정치인|교육자
성별
대표 경력 제헌국회 국회의원

[정의]

충청남도 아산군 탕정면 출생의 제헌국회 국회의원.

[가계]

서용길(徐容吉)[1912~1992]은 1912년 충청남도 아산군 탕정면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일창(一滄)이다. 충청남도 아산 출신 제헌국회 국회의원이다.

[활동 사항]

서용길은 1912년 8월 6일 충청남도 아산시 탕정면에서 태어났다. 온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서울]에 있는 사립 배재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배재중학교 재학 중이던 1932년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2회 학생계몽운동 대원으로 참가하였고, 제3회 발대식에서는 전회 대원으로 답사를 했다. 193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였으며, 이후 교토[京都]제국대학에 진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나 졸업하지 못하고 돌아와 조선화약총포 주식회사에서 근무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모교인 배재중학교로 돌아가 교편을 잡았으며,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강사,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3세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어 당시 탕정면에서 가까웠던 염치면 백암리[현 염치읍 백암리]의 백암교회를 다녔다. 연희전문학교 입학 전에 경성 천연동 석교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장을 맡았으며, 이때 조선인 비행사 김동엽을 후원하는 성금 모금을 주도하여 언론사에 전달해 주었다.

1945년 광복 직후 국내에는 다양한 정파가 생겨났으며, 이를 기반으로 여러 정당이 만들어졌는데, 이때 한국민주당에 입당하여 정치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주당의 보수적이며, 지주 중심의 정당 성격에 반감을 품어 1946년 10월 탈당하였다.

1948년 5·10선거에서 아산 지역구로 출마하여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한 윤보선(尹潽善)[1897~1990]을 누르고, 제헌국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후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이를 기반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설치했던 특별위원회]가 구성되면서 특별검찰관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외군 철퇴 요청에 관한 긴급 동의안」 제출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정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서용길의 이러한 활동은 기득권을 놓지 않고 있었던 친일파 세력들의 강한 반감을 샀다. 결국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같이 참여하였던 노인환 등의 소장파 의원들과 같이 ‘국회프락치 사건[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남조선노동당의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현역 국회의원 10여 명이 검거되고 기소된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풀려났다.

서용길은 ‘국회프락치 사건’ 관련 인물들이 전쟁 직후 북한으로 간 것과 달리 남쪽에 유일하게 남았다. 서울 수복 직후였던 1950년 11월 다시 수감되었다 풀려났고, 법원은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지속되는 감시에도 야당으로 활동하였고,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19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민족통일추진회 고문으로 있으면서 우리 사회의 올바른 발전 방향과 함께 남북 간의 진지한 대화, 중립화 통일 방안 등 남북통일을 위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1992년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서용길은 「대한민국 건국헌법을 되살리자」, 「제헌국회 프락치 사건의 진상」,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과 한반도」 등의 글을 『민족통일』에 게재하였다.

[묘소]

서용길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선영에 있다고 『한국 근현대 아산 사람들』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민족통일』
  • 조형열 편저, 『한국 근현대 아산 사람들』(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 보고사, 2014)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 대한민국 헌정회(http://www.rokps.or.kr)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http://elecinfo.nec.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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