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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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一論 |
영어공식명칭 | Emile Pierre Devise |
이칭/별칭 | 에밀리오[세례명],성일론[한국명]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성준 |
출생 시기/일시 | 1871년 - 에밀 피에르 드비즈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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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882년 - 에밀 피에르 드비즈 롱르소니에(Lons-le-Saunier)의 선교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890년 8월 - 에밀 피에르 드비즈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입학 |
출가|서품 시기/일시 | 1894년 7월 - 에밀 피에르 드비즈 사제 서품 |
활동 시기/일시 | 1894년~1932년 - 에밀 피에르 드비즈 공세리성당을 중심으로 선교와 사목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933년 - 에밀 피에르 드비즈 프랑스 랑프스에서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4년 -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발간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공세리성지박물관에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를 추모하는 공간 설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1년 -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열전』 발간 |
출생지 | 랑프스(Lemps) -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Ardèche) 투르농(Tournon) |
학교|수학지 | 선교학교 - 프랑스 롱르소니에(Lons-le-Saunier) |
학교|수학지 |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 프랑스 파리 |
활동지 | 아산공세리성당 -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성당길 10[공세리 194-1] |
성격 | 천주교 신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공세리성당 주임신부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공세리성당 주임신부로 재직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천주교 사제.
[개설]
에밀 피에르 드비즈(Emile Pierre Devise)[1871~1933, 세례명 에밀리오, 한국명 성일론] 신부는 1871년 7월 14일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Ardèche) 투르농(Tournon)의 랑프스(Lemps)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2년에 롱르소니에의 선교학교에 입학하여 예수회 소속의 신부들로부터 장차 성직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았다. 1890년 8월 파리외방전교회[1653년 아시아 포교를 위하여 프랑스에 설립된 가톨릭의 해외 전도 단체] 신학교에 입학하여, 1894년 7월 신품(神品)을 받아 사제가 되었다. 조선 선교의 사명을 띠고 8월 29일에 파리를 떠나 10월 16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고, 10월 23일 인천항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 당시 조선은 청일전쟁 중이었고 동학농민운동의 불길이 한창 타오르고 있었다. 다음 날 명동으로 가서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1854~1933] 주교에게 입국 신고를 하고 바로 조선말 공부를 시작하였다. 1895년 1월 서울 근교의 하우고개[현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하우현성당]로 파견되어 30여 명의 신자와 생활하며 조선의 말과 풍속을 익혔다.
그해 6월 간양골성당에서 이전 설립된 공세리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1년 만에 다시 서울주교관의 당가(當家)[사무국장] 신부로 발령이 나서 잠시 공세리성당을 떠났다. 공세리성당 2대 주임신부인 기낭(Guinand)[한국명 진보안] 신부가 공주 성당 설립을 위해 공주 요골 공소로 발령이 나면서, 드비즈 신부는 공세리성당 3대 주임신부로 다시 부임하여 1930년까지 총 35년간 재직하였다. 건축가이자 의술을 익힌 예술가였던 드비즈 신부는 조창(漕倉)이 있던 터를 사들여 고딕 양식의 공세리성당 건물을 짓는 등 내포 지역 천주교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성당 내에 학교를 설립하고, 성당 주변의 토지를 대량 매입하여 일제강점기에 신자들에게 싼 소작료로 임대하였으며, 보육원과 수녀원을 지원하고, 나중에 ‘이명래 고약(膏藥)’으로 발전한 ‘성일론 고약’을 만들어 종기로 고생하는 주민들을 치료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치던 드비즈 신부는 60세가 되던 1930년경부터 귀가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공세리성당 주임신부를 그만두고 서울교구청으로 전임하여 교회 건축 관련 일을 했다. 1932년 병이 깊어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1933년 8월에 고향 땅에서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는 세곡(稅穀) 운송 창고였던 공진창(貢津倉)이 있던 터를 사들여 1899년에 한옥식 성당을 건축하였고, 신자 수가 증가하자,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하여 1922년에 현재의 고딕 양식의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공세리성당은 천주교 대전교구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성당으로 주변 자연환경과 잘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으로 내포 지역의 명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에 지어진 합덕성당[1929], 예산성당[1934], 공주 중동성당[1936] 등 다른 성당의 건축 모델이 되었다.
드비즈 신부는 교회를 운영하고 서울과 인천의 수녀원과 보육원을 지원하려는 방안으로 성당 주변의 토지를 대량 매입하여 대개 천주교 신자들에게 4할 이하의 적은 소작료로 소작을 주어 운영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비신자가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또한 교회 학교 설립[1905], 공원묘지 조성[1905], 극빈자 구제, 보육원 운영 등 사회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또한 드비즈 신부는 프랑스에서 익힌 의술을 바탕으로 1906년 종기를 다스리는 고약(膏藥)을 제조하여 신자들을 치료했다. 이 고약은 드비즈 신부의 한국식 이름을 따 ‘성일론 고약(成一論膏藥)’이라 불렸는데, 이 고약의 제조법을 신자 이명래가 배우고 발전시켜서 ‘이명래 고약’을 만들었고, 이명래는 서울로 올라가서 사업을 확장하여 해방 후 명래제약을 세워 운영하였다.
[사상과 저술]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는 독실한 프랑스의 가톨릭 가문에서 태어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천주교 사제가 되어 우리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드비즈 신부는 공세리성당 주임신부로 총 35년간 재직했는데, 해마다 서울교구청으로 교구장인 뮈텔 주교에게 공세리성당[본당]과 관할 공소들에 대한 연말 보고서를 서신 형식으로 올렸는데, 대부분 남아 있어서 당시 공세리성당과 관할 공소의 상황을 알려 준다. 1994년 천주교 대전교구는 충청남도 지역에서 활동한 드비즈 신부를 포함한 13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가 보고한 연말 보고서를 정리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을 발간하였다. 또한 프랑스에서 드비즈 신부의 서한을 모은 『드비즈 서간집』을 발행하였다.
[묘소]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는 1933년 8월 31일 랑프스의 형제 집에서 사망하여, 랑프스성당의 역대 주임신부들이 묻힌 지하 묘소에 안장되었다. 묘지석에 "여기 한국에서 복음을 선포한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가 묻히다[ICI REPOSE R.P. EMILE DEVISE 1871-1933 MISSIONNAIRE EN COREE DE PROFUNDIS]"라고 새겨져 있다.
[상훈과 추모]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를 추모하기 위해 공세리성당의 공세리성지박물관에는 프랑스에 있는 드비즈 신부의 묘지석을 재현해 놓았고, 드비즈 신부의 손주가 기증한 금장(金裝) 『드비즈 서간집』과 묘에서 직접 가져온 흙을 전시하여 추모하고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로 1953년 한국에 파견되어 60년 넘게 활동하고 있는 최세구[Robert Jezegou] 신부가, 한국 선교에 생애를 바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1997년에 저술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열전』에 드비즈 신부의 약전(略傳)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