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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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孝婦東萊鄭氏旌閭 |
영어공식명칭 | Monument for Filial Daughter-in-law Dongnae-Jeongssi[Hyobu Dongnae-Jeongssi Jeongnyeo]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신달리 501-5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경윤 |
건립 시기/일시 | 1736년 - 효부 동래정씨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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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5년 - 효부 동래정씨 정려 훼손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34년 - 효부 동래정씨 정려 중수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44년 - 효부 동래정씨 정려 명정비 세움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9년 - 효부 동래정씨 정려 기와, 단청을 보수하고 홍살을 철제로 바꿈 |
개축|증축 시기/일시 | 2002년 9월 - 효부 동래정씨 정려 명정비 이전, 행장비 건립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6년 3월 7일 - 효부 동래정씨 정려 아산시 향토문화유산 지정 |
현 소재지 | 효부 동래정씨 정려 -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신달리 501-51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보성오씨종친회 |
관리자 | 보성오씨종친회 |
문화재 지정 번호 | 아산시 향토문화유산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신달리에 있는 효부 동래정씨의 조선 후기 정려.
[개설]
효부 동래정씨(東萊鄭氏)[1649~1728]의 아버지는 정은(鄭嶾)이고 어머니는 거창신씨(居昌愼氏)이다. 신창 수라리에 사는 해주오씨 선전관 오도빈(吳道彬)[1647~1706]의 부인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부모를 떠날 수 없어서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할 만큼 부모를 극진히 섬겨서 고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결혼 시기를 놓칠까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을 덜어드리기 위해 부모의 뜻에 따라 혼인을 하였다. 혼인 후에는 이미 홀로 된 시어머니에게 효를 다함은 물론 남편 또한 정성으로 섬겼다. 고모와 시동생 등 시댁 식구도 많아 시집살이의 고초가 심하였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모두 병에 걸렸을 때 지성으로 극진히 간호하였다. 그러다가 시어머니가 세상을 뜨니 애통함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예를 다해 상을 치렀다. 어머니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던 남편도 얼마 뒤에 숨을 거두었다. 정씨는 남편의 뒤를 따르기 위해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자식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세상을 뜰 때까지 선조들이 이룬 집안을 잘 지키며 살았다.
이러한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자손과 고을 선비들이 나서서 1736년(영조 12)에 효부 명정을 받았다. 집안에서 전해지는 고문서[상서]를 살펴보면 1727년(영조 3) 동래정씨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부터 효부 명정을 받기 위해 연안이씨인 진사 이의록(李宜祿)이 소두(疏頭)가 되어 내포의 각 고을 유림 66명이 순찰사에게 상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조에서 작성한 『효행등제등록(孝行等第謄錄)』의 1729년부터 1736년간의 기록에는 당시 신창 "고선전관(故宣傳官) 오도빈(吳道彬)의 처 정씨가 정려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치]
효부 동래정씨 정려는 아산시 신창면 신달리에 있다. 신창면 오목리의 신창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서북쪽으로 도로를 따라 약 0.4㎞ 간 지점에 자리한 오거리에서 오른쪽 소로를 따라 고개를 넘으면 수라리마을 입구 오른편에 있다.
[변천]
효부 동래정씨 정려의 중수 내용은 정려 내부에 걸린 1934년에 작성한 「정려중수기」, 2002년에 작성한 「효부정려약기」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영조 대에 정려가 건립되고 난 후 1875년(고종 12) 여름 태풍으로 정려가 무너지고 주초석만 남게 되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후손들이 1934년 옛터에 남은 주초석을 이용하여 정려를 중수하고 10년 뒤인 1944년 명정비를 다시 세웠다. 그 후 1979년에 당시 아산군에서 기와, 단청을 보수하고 홍살을 철제로 바꾸었다. 그러던 것을 2002년 9월 문중에서 정려 안의 명정비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정려각 내에 동래정씨의 행장비를 세웠다.
[형태]
효부 동래정씨 정려는 동서 방향으로 뻗은 구릉의 능선 부근 북쪽 사면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규모로 건립하였다. 화강석 기단 위에 팔각의 장주 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다. 가구 양식은 초익공 계통으로 하였고,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벽면은 전면과 양 측면은 철제 홍살을 설치하고 후면은 벽을 설치하였다. 양 측면에는 박공널 밑으로 중방의 위치까지 부채꼴 형태의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목재 부분에 채색 단청이 이루어졌다.
정려 안에는 명정 현판[1736년, 196×36㎝]과 「정려중수기」[1934년, 115×33㎝], 「효부정려략기」[2002년, 115×41㎝], 현판 및 행장비[2002년, 58×60×28㎝, 총높이 190㎝]가 있다. 명정 현판은 후벽의 맨 위에 걸어 놓았는데, 내용은 ‘효부 선략장군행선전관오도빈지처 영인동래정씨지려 병진년 월 일 명정(孝婦宣略將軍行宣傳官吳道彬之妻令人東萊鄭氏之閭 丙辰年月日命旌)’이라 하여 1736년(영조 3)에 명정이 내렸음을 알 수 있다.
명정 현판의 바로 아래에는 「정려중수기」를 걸어 놓았으며, 가장 아래에는 2002년 마지막으로 정려를 중수하며 적어 놓은 「효부정려략기」가 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설립한 행장비가 정려 내부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또한 정려 뒤편으로 처음 이 정려가 있던 위치에 1944년 건립된 비[35×100×15㎝, 총높이 116㎝]가 세워져 있다. 이 비의 전면에는 ‘효부 선략장군행선전관오도빈지처 영인동래정씨지려 영조십이년병진 명정(孝婦 宣略將軍行宣傳官吳道彬之妻令人東萊鄭氏之閭 英祖十二年丙辰 命旌)’이라 새겨져 있으나, 처음에는 ‘영조 9년(英祖九年)’으로 잘못 각서된 것을 그 위에 다시 ‘십이년(十二年)’으로 고쳐 썼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예조에서 작성한 『효행등제등록』의 1729년부터 1736년간의 기록에는 당시 신창 고선전관(故宣傳官) 오도빈(吳道彬)의 처 정씨가 정려를 받았고, 신창의 사인(士人) 오수경(吳遂慶)은 효행으로 제직(除職)되었다. 그리고 이전인 1716년에는 신창 유학(幼學) 오만환(吳萬奐)이 효행으로 상물(賞物)을 받았다. 신창 신달리 해주오씨와 관련된 유적의 건립이나 상물 등은 대개 1700년 초반~중반까지의 시기에 집중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기록은 당시 신창현 내에서 해주오씨 집안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효부 동래정씨 정려는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의미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