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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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常愼 |
이칭/별칭 | 권손(權襈),경호(絅好),일홍당(日紅堂),서어(西漁),효헌(孝獻)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759년 - 권상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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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96년 - 권상신 남포현감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817년 - 권상신 충청도관찰사로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824년 10월 2일 - 권상신 사망 |
부임|활동지 | 부임지 -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
묘소|단소 | 권상신 묘소 -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건지동길 |
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안동 |
대표 관직 | 남포현감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도 보령 남포현감으로 부임하여 신안사 창건을 발의한 문인 관료.
[개설]
권상신[1759~1824]은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문과 장원 급제 후 관직 생활을 하였는데, 1796년(정조 20) 보령 남포현감(藍浦縣監)으로 부임하여 주자(朱子)[1130~1200]를 제향(祭享)하는 영당(影堂)의 건립을 발의하여 신안사(新安祠)가 건립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가계]
권상신은 안동 권씨로 자는 경호(絅好), 호는 일홍당(日紅堂)·서어(西漁), 조선 초 문충공 권근(權近)[1352~1409]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권도(權導)[1710~?], 아버지는 권식(權植), 어머니는 전주 이씨 이정황(李廷煌)[1705~?]의 딸이고, 부인은 풍산 홍씨 홍낙명(洪樂命)[1722~1784]의 딸이다.
[활동 사항]
초명(初名)은 권손(權襈), 젊은시절의 호는 일홍당(日紅堂), 말년의 호는 서어(西漁)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학문에 매진하여 1786년(정조 10) 진사시에서 장원하고, 1801년(순조 1)의 문과 증광시에서도 장원을 하였다. 곧이어 전시(殿試)에도 장원을 해 ‘삼장장원(三場壯元)’이라 불렸다. 진사 입격 시 방목(榜目)[조선 태조 원년(1392)부터 고종 31년(1894)까지 문과 급제자의 인명록]에 기록된 거주지는 ‘공산(公山)’ 즉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였고, 문과 급제 때에는 거주지가 ‘한성(서울)’으로 기재되어 있다.
관직 생활 중 1796년(정조 20) 강동현감(江東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충청우도 유생들의 송사(訟事)가 있어서 남포현감과 교체하라는 특명이 내려져 그 일을 조정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일성록(日省錄)』에서 확인해 보면, 1795년 충청도 암행어사 김희순(金羲淳)이 남포현감 신재덕(申在德)의 죄상을 알리면서 신재덕은 유배되었고, 이어 부임한 조운구(趙雲衢)도 파출(罷黜)[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직무나 직업을 그만두게 함]되었다. 수령이 연달아 쫓겨나면서 남포현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특별히 지역을 안정시킬 만한 관료를 골라 남포로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권상신이 선발되었다. 정조(正祖)[재위: 1776~1800]는 권상신에게 “남포는 피폐한 고을이고 또 백성들의 습속(習俗)이 그릇되고 비뚤어졌다. 그대는 이미 형조의 낭관(郎官)을 지냈으니 내려간 뒤에 기필코 폐단을 바로잡도록 하라.”고 일렀고, 과연 권상신은 남포에서 특별한 활동을 벌였다.
권상신은 남포현에 주자천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고을 사람에게 주자를 제향하는 회암영당(晦菴影堂) 창건을 권하였고, 이에 선비들이 감흥하여 영당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바로 신안사(新安祠)이다. 남포현의 ‘신안면’이란 이름이 주자가 살던 ‘신안’이란 지명과도 같았기에 사당의 이름을 ‘신안’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고장 출신인 백이정(白頤正)[1247~1323]을 제향하는 공간이 지금까지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남포향교 재임(齋任) 김우필(金愚弼)의 이름으로 통문(通文)을 돌리고, 현감의 도움으로 1797년 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여름까지 6개월간 남포현 신안면에 신안사를 완공하였다.
그러나 1797년에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한 한용화(韓容和)가 신안사는 사사로이 서원을 건립하지 말라는 금령을 어긴 것이라 하여, 후임 현감 윤기(尹愭)로 하여금 훼철(毁撤)[헐어서 치워 버림]하게 하고, 주자의 영정은 덕산 회암사(晦菴祠)로 보냈으며, 설립을 주도한 전 현감 권상신과 부임 초기 신안사에 제재를 가하지 않은 현감 윤기의 죄를 물을 것을 조정에 상소하였고, 이어서 서원 건립을 발의한 지역 유림도 옥에 가두었다.
후에 전 남포현감 윤기가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한 원정(原情)에 의하면, 전 현감 권상신의 발의로 주자의 영당 건립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고을에는 이를 비난하는 노래가 퍼지기도 했고, 또 고을 사람들이 영당 옆에 백이정의 사당까지 짓고 있기에 금하며 감영에도 보고하였지만, 유생들이 핑계를 대며 향사(享祀)를 올리려 하던 중 한용화 감사에 의해 자신이 죄를 받게 되었다고 밝혔다.
권상신이 남포현감으로 부임하여 보낸 시간은 1년이 조금 넘는 기간이었지만,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화암서원(華巖書院)[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죽성로 411] 이후 서원이 없던 지역에 신안사 건립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지역사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학문과 저술]
홍직필(洪直弼)·정원용(鄭元容)과 함께 『국조대학연의(國朝大學衍義)』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문집으로는 『서어유고(西漁遺稿)』가 있다.
[상훈과 추모]
효헌(孝獻)의 시호가 내려졌다. 조두순(趙斗淳)이 권상신에게 시호를 내려주길 건의하며 지은 시장(諡狀)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