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8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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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立之撰 聖住寺碑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정성권 |
현 소재지 | 보령 성주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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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보령 성주사지에 있었던 통일 신라 시대의 석비.
[건립 경위]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大郞慧和尙塔碑)에 김립지찬 성주사비(金立之撰 聖住寺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어, 적어도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 건립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비편(碑片)에 문성왕 때에 활약한 김양(金陽)이란 인물이 보이는데, 김양이 857년(문성왕 19)에 사망하였으므로 적어도 857년 이전에 비를 건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낭혜화상의 공덕과 낭혜화상이 성주사에 머물게 된 배경, 그리고 성주사의 운영 성과 등을 기록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최치원이 지은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에 전하지 않는 내용이 일부 보이는데, 대표적인 예로 성주사가 본래 백제 법왕이 창건한 오합사(烏合寺)였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비문을 지은 김립지(金立之)는 825년(헌덕왕 17)에 왕자 김흔(金昕)을 따라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귀국 후에 추성군(秋成郡)[현 전라남도 담양군의 옛 이름] 태수, 한림랑(翰林郞)을 역임하였으며, 경주 창림사무구정탑지(昌林寺無垢淨塔誌)를 지었다. 비문의 글씨는 왕희지체(王羲之體)를 모아 새긴 것이다.
[형태]
보령 성주사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강당지(講堂址) 뒤편에 파괴된 이수(螭首)[머릿돌]와 귀부(龜趺)[받침돌]가 있었으며 비신(碑身)은 유실되어 있었다. 조사 결과 파괴된 이수와 귀부는 김립지찬 성주사비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까지 보령 성주사지와 보령 성주사지 근처에서 조각난 10개의 비편이 발견되었다. 대략 조선 중기까지 비가 온전하게 전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립지찬 성주사비는 이수와 귀부가 파괴되었으며, 비신 역시 일부 비편만 남아 있어 정확한 크기를 알 수 없다. 다만 비신의 가로폭 크기가 113㎝임이 확인되었으며, 전체 글자 수는 5,120자가 새겨진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와 비교했을 때 약 2,100여 자가 적혀 있었던 탑비로 확인되고 있다.
[현황]
현재 보령 성주사지에 최치원이 지은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만 남아 있고, 김립지찬 성주사비는 일부 비편만 남아 있을 뿐 온전한 비신은 전하지 않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립지찬 성주사비를 통해 보령 성주사지를 백제 시대 오합사까지 소급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