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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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성정용 |
[정의]
백제 사비 시기 왕과 왕족의 묘역인 부여 왕릉원의 굴식 돌방무덤 구조를 기초로 한 무덤 형식.
[개설]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은 백제 후기형 굴식 돌방무덤이라고도 한다.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의 전형이 확인되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일제 강점기에 처음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2023년 현재 17기의 고분이 알려져 있다. 1915년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와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에 의하여 처음으로 조사되었고, 1917년과 1938년에 추가 조사가 진행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확인된 굴식 돌방무덤은 중앙 고분군 6기, 서 고분군 4기[2기 조사], 동 고분군 5기이며, 광복 이후에는 1966년 홍사준 등이 중앙 고분군 7호분과 8호분을 조사하였다. 이후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에서 서 고분군의 4기에 대하여 (재)조사를 진행하였다.
[웅진 시기 굴식 돌방무덤과 무령왕릉의 축조]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의 성립은 웅진 시기의 무덤 양식 및 무령왕릉과 깊은 관련이 있다. 웅진 시기의 굴식 돌방무덤은 송산리형 굴식 돌방무덤[평면 방형]과 판교형 굴식 돌방무덤[평면 장방형]으로 대별된다. 송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은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돌방무덤이, 판교형 굴식 돌방무덤은 공주 금학동 고분군의 돌방무덤이 대표적이다. 송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은 무덤방의 길이와 너비 비율이 1:1에 가까운 네모꼴의 평면 형태에, 무덤방의 출입구 위치가 오른쪽에 치우쳐 있고, 천장은 궁륭(穹窿)형으로 둥글게 되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서 웅진 시기에 대표적으로 사용된 무덤 양식이다. 판교형 굴식 돌방무덤은 무덤방의 평면이 너비보다 길이가 긴 장방형이며, 이에 따라 천장 형태도 변형된 궁륭형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판교형 굴식 돌방무덤은 충청남도 공주시 금학동 일대에서만 확인되는데, 무덤방 출입구 위치가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은 송산리형과 동일하다.
523년 무령왕이 죽고 난 뒤, 당시 중국 남조를 지배하던 양나라의 무덤 축조 방식을 차용한 벽돌무덤이 만들어졌다. 무령왕릉 축조는 웅진 시기 무덤 양식의 급격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무령왕릉의 구조를 살펴보면, 무덤방은 장방형이며 남쪽 벽면 중앙에 출입구가 있다. 천장은 단면 아치형의 터널 구조를 하고 있다. 무령왕릉의 평면 형태와 천장 형태, 연도 위치 등 구조의 변화는 무덤의 규모뿐만 아니라 장법의 변화까지도 연동되었다. 그리고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처럼 무령왕릉이라는 왕의 무덤이 갖는 상징성과 영향력으로 인하여 다른 무덤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원래 무덤방을 만들기 위한 재료는 돌이었으나 벽돌로 만든 벽돌무덤이 등장하였고, 돌과 벽돌을 함께 사용하기도 하였다. 송산리 5호분은 전형적인 송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에 해당하지만, 관대와 바닥에 벽돌을 사용하였다. 교촌리 3호분은 벽돌을 쌓아 만들었으나 무령왕릉의 벽돌과는 차이가 있다. 구조적인 부분에서는 방형의 무덤방이 장방형으로, 천장 구조가 궁륭형에서 터널형으로 바뀌거나 무덤방의 출입구가 오른쪽으로 치우친 위치에서 방의 중앙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사비 시기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의 구조와 변화]
523년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왕은 538년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천도하였다. 부여 나성의 동쪽 지역인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일대에는 여러 고분군이 있는데, 일제 강점기부터 왕 묘역으로 전해진 능산리 중앙 고분군을 비롯하여 동 고분군·서 고분군, 부여 능안골 고분군, 염창리 고분군 등에서 370여 기의 굴식 돌방무덤이 확인된 바 있다. 이외에도 서쪽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나복리, 북쪽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오수리, 남쪽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정암리 일대에서 500여 기에 가까운 굴식 돌방무덤이 조사되었다.
무령왕릉으로부터 시작된 굴식 돌방무덤 구조의 변화는 사비 천도 이후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이라는 통일된 형식으로 정립되어 간다. 전형적인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은 장방형의 평면 형태와 무덤방 남벽 중앙에 출입 시설이 있는 구조이다. 무덤을 만들 때 사용된 석재는 대부분 화강암이며, 편마암도 함께 사용하여 편평한 판석의 형태로 다듬었다. 천장 구조는 고임식의 평천장이 사용되었다. 무덤방 출입구에는 문틀 시설이 설치되는데 이전 시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지만, 사비 시기에는 기본 구조로 채택되었다.
그렇다면 왕 묘역으로 알려진 능산리 중앙 고분군의 굴식 돌방무덤 구조를 알아 보자. 능산리 중앙 고분군에서 가장 이른 시점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는 돌방무덤은 중하총이다. 중하총은 중앙 고분군에서 터널형 천장을 사용한 유일한 돌방무덤으로,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하총의 주인을 사비로 천도한 성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다.
터널형 천장은 새로운 천장 구조의 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의 무덤방을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석재를 약 1m 가량의 높이로 세우고 그 위에 석재를 45° 정도 기울여 쌓는다. 다시 그 위에 천장돌을 올려 마감한다. 이러한 천장 구조는 ‘석재를 괴어 천장을 만들었다’라는 의미에서 ‘고임식’ 천장 또는 한자식 표현으로 평사(平斜) 천장으로 불린다. 이때 무덤방의 단면 형태는 ‘육각형’을 띠며, 이것이 전형적인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의 구조를 가장 잘 보여 주는 특징적인 요소이다.
그렇다면 왜 둥근 터널형 천장에서 편평한 고임식 천장으로 바뀌었을까? 이것은 무덤 축조 재료의 차이로 인한 것이라 짐작된다. 무령왕릉은 동일한 규격의 벽돌을 이용하여 무덤방을 축조하였고, 천장의 아치를 구현하기 위해 쐐기 모양의 벽돌도 함께 사용하였다. 그러나 돌은 규모가 같지 않으며, 다듬는 데 많은 인력과 비용·시간이 드는 문제가 있다. 게다가 왕실의 무덤은 일반인들의 무덤과 차별화하기 위하여 가공도가 높은 판석과 장대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즉 무덤 주인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축조 재료의 차이를 두었고, 둥근 아치를 구현하고자 터널형 천장을 도식화시킨 단면 6각형의 고임식 천장을 사용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능산리 중앙 고분군에서는 서하총, 서상총, 중상총, 동상총, 중앙 7호분이 전형적인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며,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 무렵에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장 이외에도 무덤방의 너비가 좁아지는 것, 널길의 위치 이동, 널길의 길이가 짧아지는 등의 변화가 점차 나타난다. 굴식 돌방무덤은 기본적으로 추가장을 가능하게 만든 무덤이기 때문에 다인장이 이루어질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사비 시기에 들어 무덤 주인 한 명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게 되고, 이에 무덤의 크기도 줄어들며 매장 방식의 변화를 보여 준다. 또한 웅진 시기 굴식 돌방무덤의 널길 위치는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사비 시기에 들어 점차 중앙으로 이동하여 갑(甲) 자형 평면 형태가 등장한다. 그런데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의 전형이 성립된 이후에는 왕 묘역에는 중앙 널길이, 일반 묘역에는 치우친 널길이 사용된다. 이를 통해 일정 시점이 지난 뒤에는 시간성만을 반영하던 널길 위치가 위계 차이를 보여 주는 속성으로 전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또 하나의 속성은 무덤의 축조 재료인 석재의 상태이다. 전술하였다시피 무덤 주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가공도가 높은 판석을 사용하여 무덤방을 조성하였다. 이와 달리 일반 묘역에서는 가공도가 낮은 판석과 깬돌을 함께 사용하는 양상이 나타나므로, 무덤에 묻힌 사람의 위계와 위상을 잘 보여 주는 속성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동하총의 경우 천장 구조가 평천장이어서 무덤방의 단면 형태는 사각형이다. 동하총에는 벽화가 그려졌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네 벽에는 사신도, 천장과 나머지 공간에는 연화문과 비운문이 남아 있다. 벽돌무덤인 송산리 6호분에서 사신도 벽화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동하총의 축조 시기를 사비 시기의 이른 시점으로 보거나, 출토된 목관의 측면 테두리 형태가 익산 쌍릉의 대왕묘 출토 목관과 유사한 것으로 언급된 바 있어 7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백제 굴식 돌방무덤의 규격화를 이룬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의 가장 큰 특징은 무덤 구조뿐만 아니라 규모, 사용 석재의 매수까지 제한하는 표준화·규격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한성기 굴식 돌방무덤은 큰 범주에서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다양한 속성들이 사용되었다. 웅진 시기가 되면 무덤 구조와 규모가 이전 시기보다 비교적 뚜렷한 정형성을 보이다가 사비 시기가 되어서 비로소 고도화된 규격화와 표준화가 나타난다.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은 충청남도 부여군 일대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사비 시기 백제 전 영역 내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처럼 유사한 무덤 구조와 넓은 분포 범위는 장제에 대한 공통적인 이해와 기술의 균일화가 이루어져야만 생기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의 성립은 백제 중앙에 의하여 통제된 일정한 규격이 존재하였을 것을 짐작하게 한다.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은 왕 묘역인 부여 능산리 고분군을 제외하면, 대체로 유사한 크기로 축조되었고 석재의 사용 방식도 비슷하다. 특히 충청남도 부여군과 부여군 인근 지역의 판석을 사용한 굴식 돌방무덤에서 규격화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널방 길이[250㎝ 내외]와 폭[125㎝ 내외]의 비율이 약 2:1 정도가 되어, 이를 ‘능산리 규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판석이 아닌 자연돌과 깬돌을 사용한 굴식 돌방무덤에도 ‘능산리 규격’이 적용되며, 지방의 거점 지역에서도 유사한 양상이 확인된다. 다만 영산강 유역이나 새롭게 편입된 일부 지역에서는 기본적으로 능산리형 굴식 돌방 구조를 하고 있지만, 규격화 정도가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지방으로 갈수록 축조 과정에서 지역적 특색과 2차적인 변용이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어쨌든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과 같이 정교한 굴식 돌방무덤 구조의 구현이 가능하였던 것은 수준 높은 전문 기술자와 석재 가공 기술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문 기술자 집단은 수도였던 사비와 인근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을 것인데, 사비 일대에서 확인된 굴식 돌방무덤은 뚜렷한 단면 육각형을 띠며, 규격성이 강하다.
그런데 지방까지 무덤 축조 기술자 집단을 파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무덤을 만드는 정보가 담긴 설계도가 존재하였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설계도의 존재에 대한 판단 근거는 무덤 축조에 사용된 석재의 형태와 무덤 벽을 구성하는 석재 사용 매수이다. 능산리 일대의 고분군을 분석한 연구에서 굴식 돌방무덤 구조의 다섯 가지 형식이 도출되었는데, 사비 도성 인근뿐만 아니라 지방까지도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 구조와 석재를 사용하는 방식까지 공통점이 많다. 기술자 집단이 직접 파견되지 않는 한 석재 가공 기술은 지역마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으며, 완성도도 그다지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넓은 지역에 걸쳐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의 구조가 실현되었다는 점은 설계도의 존재와 유통 가능성을 강하게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은 높은 규격성과 석재의 가공도, 구조의 완성도 등을 통하여 백제 굴식 돌방무덤 축조 기술의 수준을 보여 준다. 능산리형 굴식 돌방무덤은 표준화된 무덤 형태와 규격을 통하여 무덤 주인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며, 백제 사회의 위계화와 규제의 정도를 보여 주는 자료이다. 또한 백제 중앙의 규제 시스템이 사비 도성과 주변, 이외에 지방까지도 얼마나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유추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