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207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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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仁川李氏 |
이칭/별칭 | 인주이씨(仁州李氏)·경원이씨(慶源李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
집필자 | 최정용 |
[정의]
고려 때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고 그 후손들이 일부 진해에 들어와 세거한 창원시 진해구의 성씨.
[개설]
인천 이씨(仁川 李氏)는 인천(仁川)을 본관으로 하며, 인주 이씨(仁州李氏)·경원 이씨(慶源李氏)라고도 한다. 인천(仁川)은 본래 백제의 미추홀(彌鄒忽) 또는 매소홀(買召忽)이었다. 757년(경덕왕 16)에 소성(邵城)으로 개칭하였고, 율진군(栗津郡)[시흥]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018년(현종 9) 수주(樹州)에 속하였으며, 숙종 때 경원군(慶源郡), 인종 때 인주(仁州), 1390년(공양왕 2)에 경원부(慶源府)로 계속 승격되었다. 1392년(태조 1) 인주로 환원하였고, 1413년(태종 13)에 인천군(仁川郡)이 되었다.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는 인천 이씨(仁川 李氏)의 후손들은 임진왜란 이후 진해에 들어와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이회근(李晦根)의 아들 이임(李琳), 이박(李珀) 형제가 웅천고을 마천[현 창원시 진해구 마천동]에 정착한 이래 후손들이 진해에 세거하였다.
[연원]
인천 이씨(仁川 李氏)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은 고려 현종 조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상주국(上柱國) 소성현개국후(邵城縣開國侯)에 올랐다. 또한 소성현(邵城縣)에 식읍 1천 5백호를 하사받았는데, 그곳이 현재의 인천이며 이후 후손들이 그곳에 세거하면서 본관지로 하였다.
인천 이씨의 기원은 김해 허씨(金海許氏)까지 연결된다.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아들로서 모후(母后)의 성을 따라 허씨(許氏)가 된 인물의 후손인 아찬(阿湌) 허기(許奇)가 신라 경덕왕 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안록산의 난 때 현종(玄宗)을 호위한 공으로 이씨(李氏) 성을 사성(賜性) 받았다. 시조 이허겸은 바로 허기의 10세손이다.
허기의 후손으로 허선문(許宣文)[양천 허씨의 시조], 허사문(許士文)[태인 허씨 시조로 허선문의 아우로 추측, 인천 이씨의 족보에는 허준으로 나타남]이 있었다. 허사문은 수로왕의 비 보주태후의 30세손으로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하여 허즙(許楫)[집이라고도 읽음]과 허도(許棹)[李許謙]를 낳았다. 형인 허즙은 태인 허씨를 잇고 동생인 허도는 인천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즉 양천 허씨에서 태인 허씨로 분리되었으며, 인천 이씨는 태인 허씨에서 분리된 것으로 나타난다.
[입향 경위]
창원시 진해 지역에 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는 인천 이씨(仁川李氏)의 후손들 중 일부가 진해에 들어와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이회근(李晦根)의 아들 이임(李琳), 이박(李珀) 형제가 웅천고을 마천[현 창원시 진해구 마천동]에 정착한 이래 후손들이 진해에 세거하였다..
[현황]
인천 이씨(仁川李氏)의 중앙 종친회인 대종회와 연락을 취하여 진해 지역 문중의 상황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으나 중앙 종친회 차원에서도 진해 지역 상황에 대하여 잘 파악이 되고 있지 않을 정도로 현재 진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인천 이씨 인사들의 세가 미미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