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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 학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534
한자 光明學校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최초 설립지 광명 학교 - 충청남도 천안시
성격 학교
설립자 윌리엄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에 있었던 교육 기관.

[변천]

천안의 구 직산현은 금광 지대로 유명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는 대가로 서구 열강들에게 각종 이권을 부여하였고, 미국은 평안도 운산 금광과 입장 금광 채굴권을 얻어내었다. 따라서 입장면 양대리에는 미국인들이 광산을 채굴하였고, 광산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광산촌이 형성되었다. 이 광산촌에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이 사립 여학교인 광명 학교를 설립하였다.

1924년 6월 22일 『동아 일보』의 기사를 보면, 광명 학교는 1923년에 학부형들이 후원회를 조직하여 학교 유지와 교육 발전을 위해 매월 기금을 모금하였음이 확인된다.

[교육 활동]

광명 학교는 기독교계의 여학교이다. 광명 학교에는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16인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인 함태영(咸台永) 목사의 부친이 한문을 맡아 가르쳤으며, 함태영의 추천으로 전 중앙 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임영신이 교편을 잡으면서 학생들에게 독립 정신과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서울에서 3·1 운동이 전개되자 함태영 목사가 임영신에게 독립 선언서를 보내왔다. 이에 임영신은 학생들을 모아 놓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해주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날짜를 정하여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지시하였고, 이에 광명 학교 학생들은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광명 학교에 재학 중이던 민옥금(閔玉錦), 한이순(韓二順), 황금순(黃錦順) 등은 1919년 3월 20일 입장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기로 협의하고, 3월 17일경 학생들에게 독립 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는 한편, 학교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한편 광명 학교 교사인 강기형도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만세 시위에는 광명 학교 교사와 학생, 그리고 직산 금광의 광부와 부근의 주민들이 모여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2,0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입장 시장으로 진출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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