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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780
한자 柳義臣
이칭/별칭 언정(彦正)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1년연표보기 - 유의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유의신 알성시 병과 68위로 무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1년 - 유의신 이진 권관 부임
몰년 시기/일시 1592년 7월 11일연표보기 - 유의신 사망
성격 무신
성별
본관 고흥(高興)
대표 관직 훈련원 첨정

[정의]

조선 시대 천안 출신의 무신.

[개설]

유의신(柳義臣)[1551~1592]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우수영에 배속되어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훈련원 첨정으로 한산도 해전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가계]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언정(彦正)이다.

[활동 사항]

1583년(선조 16) 알성시 병과(丙科) 68위로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1년(선조 24)에는 시사(試射)에서 1등을 차지해 변장에 제수되어 이진의 권관이 되었다. 즉시 부임하여 군졸들을 보살피며 병기의 수리와 제조에 힘썼다. 평상시에 병기를 갖추어 놓지 않으면 위급할 때에 응할 수 없다고 말하며 유비무환의 정신을 철저하게 견지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우수영에 배속되었고, 우수사 이억기가 휘하 장졸을 불러 작전 계획을 세울 때 합리적이고 사리에 맞는 용병 계획을 진언했다. 이억기유의신을 시험해 보기 위해 “우리가 연마되지 않은 군대로 적을 당할 수 있겠는가? 적을 당하기 어려우니 헛되게 죽음을 택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의신은 크게 반발하며 “장부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칼을 뽑았는데 어찌 자신의 몸을 생각할 수 있으리오, 죽는 한이 있어도 적과 싸우겠소.”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칼을 뽑아 들고 뱃머리에 서서 휘하의 병사들에게 명령하기를, “자기 자리를 지켜 도망가기를 포기한 자는 죽이지 아니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단칼에 목을 베겠노라.”라고 하였다. 이 광경을 본 이억기유의신을 선봉장으로 삼았고, 유의신은 곧 가덕포 앞바다에서 많은 적을 맞아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유의신의 승전보를 이억기가 장계로 올려 조정에서는 유의신을 훈련원 주부에 제수하였다. 이후 웅천포 싸움에서도 크게 승리를 거두었고, 그 공로로 훈련원 첨정에 제수되었다.

유의신은 한산도 해전에 참전하여 싸우던 중 왜적이 쏜 조총에 왼쪽 겨드랑이를 맞았고, 다음 날인 7월 11일 새벽 큰아들 유연에게 지휘권을 넘겨준 뒤 진중에서 순직하였다.

[상훈과 추모]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봉되고 호조 참의가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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