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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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文命 |
이칭/별칭 | 숙장(叔章),학암(鶴巖),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창열 |
[정의]
조선 후기 천안 군수를 역임한 문신.
[개설]
조문명(趙文命)[1680~1732]은 천안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숙장(叔章), 호는 학암(鶴巖),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조형(趙珩), 할아버지는 조상정(趙相鼎)이다. 아버지는 도사(都事)를 지낸 조인수(趙仁壽)이고, 어머니는 김만균(金萬均)의 딸이다.
[활동 사항]
1705년(숙종 3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713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1721년(경종 1)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으로 있을 때 세자로 책봉된 연잉군(延礽君)을 보호하며 김일경(金一鏡)이 중심이 된 소론 과격파에 맞섰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사헌부 지평에 발탁되었다. 1725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로 승진해 탕평론을 주장하다가 민진원(閔鎭遠)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집권하면서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그해 딸이 세자빈이 되자 호조 참판과 도승지에 올라 수어사·어영대장을 겸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機效力奮武功臣) 2등에 녹훈되고 풍릉군(豐陵君)에 책봉되었으며, 병조 판서가 되었다. 이후 대제학·이조 판서를 거쳐 1730년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경종실록』의 총재관(總裁官)으로서 이를 완성하여 좌의정이 되었다.
조문명은 본래 소론 가문 출신이었지만 당쟁의 폐해를 걱정하여 붕당의 타파와 공평무사한 탕평의 실현을 정치 목표로 삼았으며, 온건론자 중심의 노론·소론 연립 정권을 구축하는 데 주력하여 영조 초 불안했던 왕권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학문과 저술]
『학암집』 4책이 남아 있다. 글씨에도 능하여 청주 삼충사 사적비(三忠祠事蹟碑)와 북백 곽재우 묘표(北伯郭再祐墓表) 등이 전한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