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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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寬順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내수 |
출생 시기/일시 | 1902년 - 유관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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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유관순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20년 - 유관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유관순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2019년 - 유관순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출생지 | 유관순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428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여 |
대표 경력 |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
[정의]
일제 강점기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유관순(柳寬順)[1902~1920]은 1919년 4월 1일의 아우내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고,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가계]
본관은 고흥(高興).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둘째 딸로 출생하였다. 독립운동가 유우석(柳愚錫)의 동생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일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관순은 이화 여자 고등 보통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유관순은 공주영명여학교에서 2년간 교육을 받은 후 공주 감리교회의 앨리스 해먼드 샤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 학당에 입학하여 교비생[장학생]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촌언니인 유예도(柳禮道)도 샤프 여사의 추천으로 유관순보다 먼저 이화 학당에 입학하여 당시 3학년 졸업반이었다. 한 집안의 두 자매가 이화 학당에서 공부하게 된 것은 지령리 주민들이 1900년대 초에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공주에서 관리하는 감리교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에 유관순은 친구 몇 명과 함께 학교 담을 넘어 합류하였다.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에서 학생단 주도하에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한 제2차 대규모 만세 운동이 있었다. 유관순은 이때에도 시위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3월 12일 학교 선배가 유예도 등 10여 명의 지방 학생들에게 고향으로 급히 내려가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3월 13일 유관순과 유예도는 고향 천안으로 내려와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려 하였으나 가난한 동리라 모을 돈이 없었다. 이에 마을 어른들은 본인들이 직접 만세 운동을 벌이자고 의견을 모았고,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柳重武), 동네 어른 조인원(趙仁元)[조병옥 부친] 등이 주동이 되었다. 그들은 음력으로 3월 1일이 되는 4월 1일 병천[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4월 1일 각지에서 약 3천 명의 장꾼이 아우내 장터에 모여들었고, 유관순은 태극기를 들고 시위 대열에 앞장섰다. 유관순은 병천 일본 헌병 주재소의 헌병에 의해 주재소로 끌려가다가 도망쳤고, 약 1천 5백여 명의 군중과 주재소 입구에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이 과정에서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유관순은 박종환의 집에서 2~3일 몸을 숨기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서 빠져나오던 중 헌병들에게 체포당했다.
공주 지방 법원은 아우내 만세 운동 주동자들인 유관순, 유중무, 조인원 세 사람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였다. 이에 경성 복심 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고, 유관순 등은 징역 3년형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에 불복하여 다시 최종심인 고등 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유관순은 “삼천리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느냐.”라며 상고를 포기했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유관순은 감옥에서 계속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함께 수감되어 있던 이화 학당 박인덕 교사의 만류로 잠시 잠잠하게 있다가, 1920년 3월 1일 3·1 운동 1주년을 맞아 유관순은 또다시 감옥 안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때 갖은 고문을 받아 방광이 파열되었고, 결국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감옥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묘소]
유관순의 시신은 약 보름이 지나서야 이화 학당에서 인계받을 수 있고, 정동 교회에서 간략한 장례 의식이 거행된 뒤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 후 묘지는 일제의 도시 개발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유관순의 애국혼을 기려 1962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복원된 생가와 기념 교회가 있고, 탑원리에 유관순의 사우와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2019년에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