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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0946
한자 李範奭
이칭/별칭 철기(鐵驥),인남(麟男),철기(哲琦)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0년 10월 20일연표보기 - 이범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2월 - 이범석 북로 군정서 연성 대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4월 - 이범석 서로 군정서 경영 신흥 무관 학교 교관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0월 - 이범석 청산리 전투에서 제2 중대장으로 활약
활동 시기/일시 1923년 5월 - 이범석 연길현 명월구에서 김규식과 함께 고려 혁명군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41년 9월 17일 - 이범석 중경에서 대한광복군 창설
활동 시기/일시 1946년 6월 - 이범석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이범석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활동 시기/일시 1950년 - 이범석 주중국 대사, 내무부 장관 역임
추모 시기/일시 1969년 - 이범석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여
몰년 시기/일시 1972년 5월 11일연표보기 - 이범석 사망
성격 독립운동가|정치인
성별
대표 경력 광복군 참모장|국무총리|국방부 장관|내무부 장관

[정의]

일제 강점기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개설]

이범석(李範奭)[1900~1972]은 중국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에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대첩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1941년 임시 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참모장으로 참가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 민족 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을 창설하여 청년 교육에도 힘썼다. 1948년에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및 국방 장관 등을 역임했다.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철기(鐵驥)이며, 이명으로 인남(麟男), 철기(哲琦)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광평 대군의 후예로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목천에 우거하였다. 이범석의 종조할아버지는 이목연(李穆淵)으로 판서를 지냈고, 문정공(文貞公)의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할아버지는 부사용을 지낸 이인천이고, 아버지는 이문하(文夏)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이다.

[활동 사항]

1. 학력

이범석은 1913년 이천 공립 보통학교를 거쳐 경기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에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9년 원난 육군 강무학교(雲南陸軍講武學校)를 수석 졸업한 뒤, 신흥 무관 학교 교관, 북로 군정서 교관을 거쳐 1920년 사관 연성소(士官練成所) 교수부장 등을 지냈다.

2. 북로군정서 활동과 청산리 대첩

1919년 만주에 있던 대종교인 중심의 ‘중광단’이란 단체가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조직하였고, 서일(徐一), 현천묵(玄天默), 계화(桂和), 이장녕(李章寧) 등이 중심이 되어 김좌진(金佐鎭)을 초빙하여 독립군을 훈련토록 하여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1919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시로 명칭을 북로 군정서로 개칭하고 군대 조직으로 편성하였다. 서일을 총재로 하여, 총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 사단장에 김규식(金奎植), 여단장에 최해(崔海), 연대장에 정훈(鄭勳)이 임명되었다. 이범석은 연성 대장(硏成隊長)이 되어 길림 분서 고문 윤복영(尹復榮), 군기 감독 양현(梁玄)과 같이 무장 독립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부터 일제가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독립군 조직들이 미리 산간 안전지대로 이동하였다. 북로 군정서도 10월에 백두산 숲속으로 이동하던 중 청산리 어귀인 허룽[和龍]의 삼도구(三道溝)에 이르러 일본군 동지대 1만여 명과 만나서 접전하였다. 10월 20일부터 23일 사이에 10여 차례 교전을 하였는데, 총사령관 김좌진을 도와 제2 대대 지휘관 이범석은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 대첩이다.

3. 광복군 및 해방 후 활동

이범석은 1923년 김규식 등과 고려 혁명군(高麗革命軍)을 창설하여 고려 혁명군 기병대장을 맡기도 하였다. 1922~1925년에는 러시아 합동 민족군 프리모르스키 지구 지휘관으로 러시아 혁명전에 참가하였다. 그 뒤 중국 항일군의 흑룡강성군(黑龍江省軍) 작전 과장을 역임하였고, 1934년 뤄양 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적군관 대장(韓籍軍官隊長)을 지냈다. 중국 육군 제3 로군 참의급(參議級) 고급 참모[중국군 소장], 중국군 제3 집단군 55군 군단 참모처장, 1940년에는 중국군 중앙 훈련단 중대장을 거쳤다.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제2 지대장으로 미국군과의 합동 작전에 참가하였고, 1945년 광복군의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범석은 광복이 되자 연합군 자격으로 귀국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6년 6월 귀국하였다. 이후 이범석은 같은 해 10월 조선 민족 청년단을 창설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을 지냈으며, 1950년에는 주중국 대사,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저술 및 작품]

회고록인 『우등불』, 『방랑의 정열』 등이 있고, 논설집으로 『민족과 청년』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6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유해는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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