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4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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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鼎福 |
이칭/별칭 | 백순(百順),순암(順庵),문숙(文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임명순 |
[정의]
조선 후기에 목천 현감을 지낸 인물.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漢山病隱)·우이자(虞夷子)·상헌(橡軒)이며 제천(提川)에서 태어났다. 고조할아버지는 안시성(安時聖)으로 현감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 안신행(安信行)은 종 8품의 빙고별검(氷庫別檢)이었다. 할아버지 안서우(安瑞羽)는 예조참의이고, 아버지 안극(安極)는 증 오위도총부부총관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 이익령(李益齡)의 딸이다.
[활동 사항]
1717년(숙종 43) 외할머니상을 당하여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영광(靈光) 월산(月山)의 농장에서 생활하다가 1719년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벼슬을 하게 됨에 따라 남대문 밖 남정동(藍井洞)으로 귀경한 뒤 1721년(경종 1) 10세에 처음으로 학문 길에 들어섰다. 그 뒤 할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전전하다가 1736년(영조 12) 선영이 있는 광주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에 정착하였다. 집안은 전통적으로 남인이었기 때문에 다른 남인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그 아버지 때부터 당쟁에 희생이 되어 벼슬길이 끊긴 불우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경학(經學)은 물론, 역사, 천문, 지리, 의약 등에 관한 지식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단 한번도 응시하지 않았다. 1746년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면서부터는 학문의 목표를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두고 이를 위해서 진력하였다. 1749년 처음으로 만령전참봉(萬寧殿參奉)에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내직으로는 감찰,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65세 때에 목천현감(木川縣監)을 지냈다. 그러나 70세 이후에 받은 통정대부, 가선대부 등의 산직은 고령에 따른 예우에 지나지 않았다.
이익의 가르침을 받는 한편,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여러 학자들과 어울려서 토론하고 학문적 교환을 가지면서 실학의 사상적 영역을 넓혀나갔으며, 경세치용의 구체적인 모색을 위한 사상적 정립을 꾀하여 갔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들을 저술로 남기게 되었다.
[학문과 저술]
그의 저술로는 『순암 선생 문집(順菴先生文集)』 30권 15책이 있고, 『동사강목(東史綱目)』, 『하학지남(下學指南)』, 『열조통기(列朝通紀)』, 『임관정요(臨官政要)』, 『계갑일록(癸甲日錄)』, 『가례집해(家禮集解)』, 『잡동산이(雜同散異)』,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등이 있다.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은 그의 주변을 위협하였던 천주교의 박해와 안정복과 같은 전통적 조선학인의 서학(西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저술이기도 하다.
이익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신후담, 윤동규(尹東奎), 이병휴(李秉休) 등을 만나 교분을 쌓고 일생 동안 성호 이익에게 사사하면서 그의 학풍을 계승한 사람이 되었다.
광주 덕안에 순암(順菴)이라는 서실을 짓고 문하생들을 양성하여 이기양(李基讓), 이가환(李家煥), 황덕일(黃德壹), 황덕길(黃德吉), 권철신(權哲身)과 권일신 형제 등이 배출되었다.
목천현감으로 재직 중에는 목천읍지인 『대록지』를 편찬하였다. 『대록지』는 상권의 내용 구성은 군명(郡名)·건치연혁(建置沿革)·관원(官員)·강역(疆域)·면리(面里)·풍속(風俗)·형승(形勝)·산천(山川)·토산(土産)·진공(進貢)·누정(樓亭)·공해(公廨)·교원(校院)·부향숙(附鄕塾)·단묘(壇廟)·전결(田結)·창곡(倉穀)·부세(賦稅)·요역(徭役)·늠봉(廩俸)·군기(軍器)·호구(戶口)·군액(軍額)·제언(堤堰)·역원(驛院)·교량(橋梁)·허시(墟市)·불우(佛宇)·고적(古蹟)·고사(古事)·제영(題詠) 등으로 되어 있고, 하권은 임관(任官)·읍선생안(邑先生安)·성씨(姓氏)·인물(人物)·유행(儒行)·문예(文藝)·효자(孝子)·열녀(烈女)·충의(忠義)·과환(科宦)·사마(司馬)·음사(蔭仕)·무직(武職)·수직(壽職)·총묘(塚墓) 등으로 되어 있다.
모든 항목의 내용이 풍부하여 19세기 초에 작성된 읍지 중에서 가장 충실하며, 호구조에는 1816년의 호구수가 남장(男壯)·노(老)·약(弱)·여장(女壯)·노(老)·약(弱)으로 구분, 기록되어 있다.
목천현감으로 재직 중에 목천읍지인 『대록지』를 편찬하면서, 목천의 건치 연혁에서 목천 지역은 마한의 땅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가 남하할 때 마한 왕이 동북쪽 100리에 도읍을 하게 하였던 땅이 직산의 남쪽 지역에 있는 곳으로 설명하여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지임을 설명하고 있다.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부아악을 북한산으로 보아 백제의 첫 도읍지를 서울 지역으로 본 것에 비해 안정복은 『동사강목』의 백제사에서 백제의 첫 도읍지를 마한 왕이 동북쪽 100리를 준 땅을 검증하여 직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묘소]
광주시 중대동(中垈洞) 텃골의 광주 안씨의 선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01년(순조 1년) 천주교 탄압에 앞장선 노론 벽파(僻派)로부터 천주교 비판의 공을 인정받고 자헌대부(資憲大夫) 광성군에 추증되었다. 사후에 정 2품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광성군(廣成君)에 추봉되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