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12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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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建國準備委員會 |
영어공식명칭 | Preparatory Committee for Building the Countr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양수 |
관련인물 | 여운형(呂運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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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연도/일시 | 1945년 8월 15일 |
[정의]
광복 직후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설립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소속 지부.
[개설]
온건좌파 여운형 측이 해방 전에 조직하였던 ‘건국동맹’을 모체로 발족시켜 정치범을 석방하고 치안대를 조직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약칭 ‘건준(建準)’이라 한다.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 15일 조선에서는 민족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에 이르는 지부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건준’의 치안대가 경찰관서를 접수해 가는 과정에서 총독부는 8월 16일 갑자기 행정권의 이양을 거부하고, 조선군사령관이 경찰관서 등을 다시 접수하였다. 미군 진주군 사령관 하지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사이에 항복조인이 9월 9일 체결되었다. 미군은 중경(重慶)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건준’을 중심으로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을 모두 승인하지 않았다.
[설립목적]
건국준비를 위한 대표기관 역할과 정치세력의 형성을 목적으로 한다.
[설립경위]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이 건국준비를 위해 자신의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건설하였다. 8월 17일 제1차 부서 결성을 하여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부장 최근우, 재무부장 이규갑, 조직부장 정백, 선전부장 조동호, 무경부장 권대석 등을 임명했다. 산하단체로는 치안확보를 위한 건국치안대, 식량확보와 보급을 위한 식량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했다.
[활동사항]
치안유지회 준비위원회가 17일 개최되어 정안립(鄭安立)을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파견된 충청북도의 책임자로서 사상범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날 청주 중앙광장에서 민중대회가 개최되고, 출옥한 사람들은 열렬히 연설하였다.
치안유지회의 위원장 등이 18일 지사를 만나 정권을 양도하라고 요구했으나, 지사는 중앙으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은 바가 없다고 거절하였다. 마침내 청주의 이명구(李明求) 집에서는 별도로 치안유지회 결성을 준비하는 모임이 진행되어, 실행대로서 목총으로 무장한 보안대가 발족하였다.
대일 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이 8월 8일 급속히 남하하는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15일 여운형에게 ‘17일 오후 2시까지 소련군이 서울에 입성할 것이 예상되므로 연합국이 들어올 때까지 치안유지는 총독부가 맡겠지만 측면에서 협력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여운형은 5개 항의 요구조건을 전제로 이를 수락하였지만, 총독부측의 기대와는 달리 치안협력의 차원을 넘어서 ‘건준’을 수립하고, 조선인 자치정부 수립을 향해 신속히 움직였다.
[총독부의 태도 돌변]
그러나 8월말 38선 이남 지역에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은 이러한 초기 상황을 전환시켰다. 지구사령관 고바야시(小林)는 22일 이후 치안유지회를 인정하지 않고, 방해(方海) 보안대장을 연행하고 치안유지회의 해산을 선언하였다. 이즈음 각지의 면사무소 행정은 정지 상태에 있었다.
금융의 예금소동이 임박하여 몇 차례 서울에 사람을 보내 조선은행권을 운반하여 왔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배급미가 부족하기 시작했다. 9월 말 헌병대는 대전으로 철수하여, 청주지역에 살던 약 5,000명의 일본인들은 10월 25일부터 5일 만에 철수하였다.
[의의와 평가]
건국준비위원회는 국민들의 지지하에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반민주적 반동세력을 제외한 민주세력의 통일전선적인 정권 예비기관이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됨에 따라 10월 7일에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들은 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어 활동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