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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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升旦 |
영어음역 | Yu Seungdan |
이칭/별칭 | 유원순(兪元淳),문안(文安),인동백(仁同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고려 후기 칠곡 출신의 문신.
[개설]
고려 명종 때부터 고종 때까지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관료로, 고려 고종(高宗)의 사부이다.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초명은 원순(元淳). 유승단은 최우(崔瑀)와 함께 강화에서 송도로 환도(還都)하는 데 공(功)을 세워 인동백(仁同伯)에 봉해졌다.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되어 고려 때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낸 유승석(兪承碩)을 중조(中祖)로 삼고 칠곡군 인동면[현 구미시]인동(仁同)을 본관으로 하여 인동 유씨의 세계를 이어왔다.
[활동사항]
1190년(명종 20) 5월 과거 시험에 명종 때 황보위(皇甫緯), 조충(趙冲), 이규보(李奎報), 한광연(韓光衍), 진식(陳湜), 유충기(劉冲基), 윤우일(尹于一), 신례(申禮), 최극문(崔克文), 이의(尹儀), 김연수(金延脩) 등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여 시학(侍學)이 되었다. 최충헌(崔忠獻)에 의하여 강종이 강화로 추방되면서 유승단도 배척을 받아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 희종 때 남경(南京)의 사록참군(司錄參軍)이 되었으나, 유수 최정화(崔正華)와 틈이 생겨 퇴직하였다.
고종이 즉위하자 수궁서승(守宮署丞)이 되었다가 뒤이어 사부(師傅)가 되었다. 1223년(고종 10)에 예부시랑 우간의대부(禮部侍郎右諫議大夫)가 되었다. 1227년(고종 14)에는 수찬관(修撰官)으로서 최보순(崔甫淳), 김양경(金良鏡), 임경숙(任景肅) 등과 함께 『명종실록』을 편찬하였다. 1228년(고종 15)에 추밀원부사 좌우산기상시(樞密院副使左右散騎常侍)에 올랐고, 뒤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같은 해 최충헌의 후예로 자주 부사(慈州副使)였던 최춘명이 관속과 주민들을 인솔하고 성(城)을 고수하여 항복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대집성과 살례탑이 고려에 압력을 넣어, 최이가 최춘명을 죽이려 하자, 유승단은 그것을 끝까지 반대하였다. 1232년(고종 19) 8월 병자일에 사망하였는데, 당시의 관직은 참지정사였다.
[학문과 사상]
유승단은 말이 적고 성품이 침착하고 겸손하며 박문(博聞)하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특히 고문(古文)에 정교하여 『한림별곡(翰林別曲)』에서도 ‘이인로(李仁老)의 시(詩), 유원순의 문(元淳文)’이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경사(經史)에도 조예가 깊어 뜻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해석하여 의심이 없게 하였으며, 불전(佛典)에도 능통하였다. 일찍이 상서 박인석(朴仁碩)으로부터 신주(神柱)와 같은 존재라는 칭찬을 받았다. 유승단의 시문은 『동문선(東文選)』, 『청구풍아(靑丘風雅)』 등에 전해진다.
유승단에 관련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 권71 지2 악2 속악 한림별곡, 『고려사』 권22 세가22, 『고려사』 권99 열전12 이지명, 『고려사』 권103 열전16 최춘명, 『고려사』 권22 세가22 고종1, 『고려사』 권22 세가22 고종1, 『고려사』 권95 열전8 임의, 『고려사』 권112 열전25 이존오, 『고려사』 권73 지27 선거1 과목1, 『고려사』 권24 세가24 고종3, 『고려사』 권74 지28 선거2 과목2, 『고려사』 권101 열전14 권경중, 『고려사』 권23 세가23 고종2,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인물,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慶尙道) 인동(仁同) 인물(人物),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권25 설부(說部)4 등에서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