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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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塔 |
영어의미역 | Pagoda, Stupa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고대/고대,조선/조선 |
집필자 | 황정숙 |
[정의]
경상북도 칠곡 지역에 있는 예배의 주요 대상이 되는 불교 조형물.
[개설]
본래 불교에서 탑은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출발하였으나, 지금은 석가모니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석조물을 포함한 개념으로 불교의 예배 대상이다. 우리나라에서 탑은 4세기 후반에 중국을 거쳐 불교 수용이 이루어지면서 불상과 더불어 조성되기 시작하여 한국의 고대 미술을 대표하는 조형물로 건립되었다. 탑은 일반적으로 그 재료에 따라 목탑, 석탑, 청동탑, 금동탑, 전탑 등으로 분류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초기에는 중국 탑을 모방하여 목탑이 건립되다가 삼국시대 말 목탑을 모방한 석탑이 조성되면서, 점차 대부분의 탑이 석탑으로 건립되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우리나라의 탑은 1,000여기에 이르지만, 칠곡에 현존하는 탑은 불과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칠기성삼층석탑(漆箕聖三層石塔)과 우리나라에 몇 개 잔존하지 않는 전탑 중에서도 그 규모와 양식 면에서 빼어난 조형미를 보여주는 송림오층전탑(松林五層塼塔)은 칠곡 지역의 불탑의 우수성을 대변한다. 또한 본래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에 있다가 1924년 서울 경복궁으로 옮겼다가 다시 1994년 12월 다시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옮겨 관리되고 있는 정도사지 오층석탑(淨兜寺五層石塔)도 칠곡의 탑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탑이다.
[기성리 삼층석탑]
기삼층석탑(箕三層石塔)은 동명면 기성삼거리 국도변 좌측 기성리 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으로 높이 5.2m의 화강암재 석탑이다. 이곳에는 신라시대에는 법성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일명 ‘법성탑’이라고도 한다. 탑은 1971년 1월 도굴범에 의해 도괴되면서 2층 옥개 상면에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1971년에 도괴된 탑을 복원하면서, 3층까지는 그대로의 형태를 갖추긴 했으나, 그 위 부분은 원형을 잃었다. 가로 5m, 세로 4m의 하층 기단 위에, 가로 1.97m, 세로 1.97m의 상층 기단을 놓고, 그 위에 탑신이 세웠다. 전체 높이가 약 5.2m이다. 하층 기단은 8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주와 탱주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상층 기단은 4개의 면석으로 짜맞춘 것으로 각 면에 둥글고 큼직한 안상(眼象)을 가득 차게 새기고 있어 우주나 탱주의 모각은 보이지 않는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인 옥개석은 각각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탑신에는 우주를 모각하였고 옥개석의 아래 층급받침은 5단씩으로 3층이 동일하다. 옥개석의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치켜 올려져 있다. 탑의 상륜부는 노반(露盤, 머리장식받침)만이 남아있다. 사리공은 옥개 가운데 정사각형의 홈이 파져 있고 그 둘레에 4개의 직사각형의 홈이 파진 구조로 일반 사리공과는 다른 구조를 보이고 있다. 상층기단 중 4면 중 1면은 1971년 복원 때 만들어 넣었다.
[송림사 오층전탑]
송림사 오층전탑(松林寺 五層塼塔)은 칠곡군 동명면 송림길 73[구덕리 91-6] 송림사 대웅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전탑이다. 형태와 재료,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9세기 초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중에 피해를 입어 탑신이 북으로 기우뚱해졌는데, 1959년에 부분 보수 후, 다시 1961년에 전면 해체·복원되었다. 규모는 높이 16.13m, 기단 폭 7.3m로, 전(塼)과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다. 지대석 위에 토축으로 기단을 하고 주변과 상단 가장자리로 판석과 갑석을 얹었다.
기단의 각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와 5개의 탱주(撑柱)를 모각하고, 그 위로 갑석(甲石)을 덮은 후 중앙에 1단의 화강암으로 탑신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로 5층의 전탑 탑신을 올렸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를 모두 벽돌로 축조하였는데, 벽돌의 크기는 1변의 길이가 27㎝, 두께 6.2㎝의 방형전과 이것을 반으로 자른 장방형전, 2가지가 섞여 사용되었다. 벽돌의 색깔이 조금씩 달라 오히려 전체적으로 멋스럽다. 또한 탑신부에는 곳곳에 문양전(紋樣塼)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층 옥신은 비교적 높으나 2층 이상의 옥신의 체감률은 완만하여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옥개는 전탑의 공통 방식인 상하에 층단을 두었으며, 벽돌 한 장 두께로 처마를 삼고 있는데, 밑의 받침 수는 1층부터 9단, 7단, 7단, 6단, 4단이며, 낙수면의 층단 수는 11단, 9단, 8단, 7단, 5단이다. 추녀의 넓이는 다른 전탑에 비해 약간 넓은 편이다.
상륜부는 5층 옥개 위에 노반의 신부를 쌓고 그 위 네 귀에 풍경이 달린 동판을 얹어 갑석을 대신하였다. 동판 위의 각 부분은 금동제로 되어 있는데 찰주는 목재이며 그 위에 동판을 씌운 다음 복발, 앙화, 보륜, 용차, 보주를 두었다. 현재의 상륜부는 1959년 해체·보수 공사 때 원형대로 모조한 것이다. 해체 보수 시 현재보다 좁은 4.5㎝ 정도의 원래의 기단 석축흔적을 확인하였으며, 초층 옥신 남쪽에는 본래 감실이 있었으나 후대에 폐쇄된 것을 확인하였다. 2층 옥개에서는 채색이 있는 거북형 석함 속에서 사리구가 발견되었는데, 금동 전각형 사리기 안에 안치된 녹색 유리제 사리병을 비롯하여 유리잔, 수지형(樹枝形) 금동 장식, 옥류(玉類), 금제품 등의 유물이 있었다. 3층 옥개에는 나무 뚜껑을 덮었던 석궤(石櫃)가 있었으나 속에는 부식된 경전의 흔적만 있었다. 상륜부 복발 안에서는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상감 원형합이 발견되었다. 감실 내부에서 조선시대의 목불과 파손된 석불 및 동불이 발견되었다. 송림사 5층전탑에서 발견된 사리 장치는 보물 제325호로 지정되어 국립대구박물관에서 보관·관리하고 있다.
[백운리 석탑]
백운리 석탑(白雲里 石塔)은 지천면 백운리 사지에 있는 폐탑이다. 절 터에 흩어져 뒹굴던 부재를 모아 대강 탑의 형태만 갖추어 놓은 것이다. 남아 있는 석탑의 부재를 보면 상층기단의 면석은 4매로 구성되었고, 폭 95㎝의 각 면에는 탱주 1개와 양쪽에 우주를 각출했으며, 상층 갑석은 하면에는 부연을 각출하고 상면에는 2단의 고각형 괴임을 각출시켜 탑신을 받고 있다. 갑석 1변의 길이는 112㎝이며 2매로 구성되어 있다. 초층 탑신의 높이는 54㎝, 폭 51㎝로서 우주를 각출했다. 옥개석의 폭은 90㎝이고 4단의 받침과 1단의 괴임을 각출했다. 또 다른 옥개석은 폭이 77㎝로 역시 4단의 받침과 1단의 괴임을 각출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개이고 크기가 소형인 점 등 부재에 나타나는 시대 양식으로 보아 신라 말이나 고려시대 조성된 탑으로 보인다. 조금 떨어진 논둑에 옥개석, 지대석 등의 탑재로 보이는 석재가 박혀 있다.
[정두사지 오층석탑]
정두사지 오층석탑(淨兜寺址 五層石塔)은 보물 제3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에 있던 것으로 1924년에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 왔다가 1994년 12월에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옮겨 세워졌다. 탑의 윗층 기단(基壇) 전면에 탑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탑 안에서 형지기(形止記)가 발견되어 건축하게 된 내력, 사리구 봉납 사실 등의 기록이 나옴으로써 1031년(고려 현종 22)에 세운 것임이 밝혀진 중요한 고려 석탑이다. 또한 형지기와 함께 녹유사리병(綠釉舍利甁)과 동합(銅盒) 2개가 발견되었다.
탑은 2층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하층 기단에는 탱주(撑柱)를 두지 않고 각 면에 3구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상층기단에는 각 면에 탱주를 하나씩 모각하였다. 기단 갑석 윗면은 약간 경사져 있으며, 탑신 괴임은 1단이다. 탑신부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탑신에는 문(門) 안에 자물쇠 모양이 새겨져 있다. 탑신의 체감 비율, 4단의 옥개 받침, 옥개 추녀의 처리 등이 고려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추녀 밑으로 홈줄이 새겨져 있다. 5층 옥개석이 없어져서 5층 탑신 위에 노반(露盤)이 바로 얹혀있다. 높이는 4.6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