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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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顯光 |
영어음역 | Jang Hyeongwang |
이칭/별칭 | 덕회(德晦),여헌(旅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헌규 |
[정의]
조선 중기 칠곡 출신의 학자.
[가계]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고려 초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을 지낸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는 인동장씨이다. 덕녕부윤(德寧府尹) 장안세(張安世)의 8세손이며, 증 이조판서 장열(張烈)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산이씨, 부인은 청주정씨이다.
[활동사항]
1595년(선조 28)에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퇴하였고 그 후 형조좌랑·순천군수, 광해군 때 합천군수·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 인조 때 지평·장령·집의·공조참의·이조참판·대사헌·공조판서·우참찬·지중추부사 등 모두 20여 차례에 걸쳐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평생 동안 1년 미만의 벼슬을 한 채 오로지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이괄(李适)의 난(亂) 후 부름을 받아 왕에게 정치에 관한 건의를 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경상우도(慶尙右道) 호소사(號召使)로서 각 주(州)·군(郡)에 격문을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일으켰으며, 1637년 1월에는 삼전도(三田渡)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동해안의 입암(立巖)[영일군 죽장면 입암리로 당시에는 영천군 소속]에 들어가서 은둔하여 학문과 덕행을 닦다가 같은 해 9월 7일 84세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사상]
“덕(德)은 도(道)의 지선(至善)한 것”이라 정의하고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이이(李珥)의 설에 찬동하여 “이(理)와 기(氣)는 서로 체용(體用)될 뿐이므로 경(經)과 위(緯)로 나누어 해석할 것”을 주장했다. 의학에도 밝았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여헌문집(旅軒文集)』, 『성리설(性理說)』, 『역학도설(易學圖說)』, 『역봉총설급구설(易封總說及究說)』, 『만학요회(晩學要會)』, 『도서발휘(圖書發揮)』 등 다수가 있다.
[묘소]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57년(효종 8)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경상북도 성주의 천곡서원, 선산 여헌영당, 인동 동락서원, 청송 송학서원, 영천 임고서원, 의성 빙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현재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는 여헌학연구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