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18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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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惠-要塞架山山城 |
영어의미역 | Fort of Heaven´s Blessing, Gasansanseong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산98-1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희돈 |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석축 산성(山城).
[개설]
팔공산의 최고봉인 비로봉[1,192m]에서 시작된 산맥의 서북쪽 15㎞ 지점의 끝 부분에 위치한 가산(架山)은 평정봉으로서 산정부에는 상당히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곳 정상에 위치한 가산산성은 서북쪽으로 천생산성과 유학산(遊鶴山)[해발 839m]에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다부동에 접해 있다. 가산(架山)은 일명 칠봉산(七峰山)으로 불리는데 나지막한 7개의 봉우리로 둘러쌓여 있기 때문이다. 읍치(邑治)가 있었으므로 읍명, 즉 군명을 ‘칠곡(七谷)’이라 불렀는데 이후 칠곡(七谷)을 ‘칠곡(漆谷)[옻나무가 많이 자라는 마을]’으로 표기를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립경위]
산성은 임진왜란(壬辰倭亂)[1592]과 병자호란(丙子胡亂)[1636]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가산(架山) 요새에 삼중(三重)으로 축성하였다. 가산은 『경상도 지리지(慶尙道 地理志)』 팔거현(八莒縣)조에 ‘명산 가사산 재현북(名山 架士山 在縣北)’이라 하였다. 성 아래는 ‘동래-밀양-대구-상주-충주-서울’을 잇는 상경로(上京路)의 요충이며, 임진왜란 때는 명(明)의 원군 5천명이 진주하고, 한때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야전(野戰)보다 수성(守城)에 능했던 우리나라는 산성(山城)이 많아, 조선시대 8백여 개의 성곽 중 276개가 산성이다. 전통적인 ‘청야입보(淸野入堡)’전술은, 주로 평야 앞쪽 산에 축성, 성 안에는 우물과 군창(軍倉)을 두고 골짜기에 성문(城門)과 수구(水口)를 만들었으며, 성문 주변은 큰 돌로 튼튼하게 쌓았다.
1639년(인조 17), 경상도관찰사로 제수된 이명웅(李命雄)[1590~1642]은 부임인사인 사조(辭朝)때 “경상도 산성 중에 믿을 만한 곳은 진주성(晋州城)·금오산성(金烏山城)·천생산성(天生山城)의 3성 뿐이므로 적합한 곳에 축성할 것”을 상주(上奏)하였다. 도임 후, 천생산성(天生山城)은 형세가 험하기는 하나 좁고 천정(泉井)이 없으므로, 금오산성(金烏山城)을 가축(加築)하는 한편, 최적지인 팔거현의 가산(架山)에 축성할 것을 계청(啓請)하고, 1639년 9월부터 인근 고을의 남정(男丁) 10만여 명을 징발하여 이듬해 4월까지 내성을 쌓았다.
가산산성(架山山城)이 축성되면서 5월에는, 경산부(京山府)[현 星州]에 속했던 팔거현이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이후 약 180년간 읍치(府의 치소(治所))를 가산산성 안에 두었으며, 진관(鎭管)은 4개 현[군위, 의흥, 신령, 하양]을 관장하였다. 그러나 이명웅(李命雄)은 축성 공사를 너무 가혹하게 추진한다는 논핵(論劾)을 받아 경상감사(慶尙監司)를 떠나고, 후임 감사들은 계속 추진하기를 꺼려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 후 경상감사 임담(林墰)[1596~1652]은 “관방(關防)이 이보다 더 장엄한 곳이 없다”면서, 이명웅 감사의 훌륭한 방략(方略)을 치하하고, 당시의 장사(將士)들에게 벼슬과 상을 추증(追贈)할 것을 계청(啓請) 하였다. 1648년(인조 26) 제6대 칠곡도호부사 이지형(李枝馨)[1608~?]이 경상감사 이만(李曼)[1605~1652]과 합심하여, 군병과 승려를 동원하여 불과 수개월 만에 건물·포루(砲樓)·남쪽 곡성(曲城)·북쪽 구책(舊柵)을 중수(重修)하였다. 외성은 1700년(숙종 26) 경상도관찰사 이세재(李世載)[1648~1706]의 장문(狀聞)[임금에게 글을 올림]으로 왕명을 받고, 1701년까지 완성하였다. 중성은, 1741년(영조 17) 경상도관찰사 정익하(鄭益河)가 장문하여 왕명으로 당년에 완성하였다. 가산산성은 1639년(인조 17) 내성의 축성을 시작하여, 1700~1701년 외성, 1741년 중성을 완성하기까지 100여년의 긴 세월이 소요되었다. 17~18세기에 걸쳐 정상에 내성, 중턱에 중성, 하단에 외성을 쌓은 3중의 포곡식 석성으로써 금오산성, 천생산성과 더불어 영남 지방을 방비한 ‘영남 제1관방’의 역할을 하였다.
경산부의 관할 하에 있던 칠곡은 가산을 축성한 후 칠곡도호부를 두어 중성 안에 공해(公廨: 관가의 건물)를 설치하여 군사적으로 군위, 의흥, 신령, 하양 등 4개 고을을 관장하였다. 칠곡도호부사는 무삼품(武三品)으로,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와 가산수성장(架山守城將)을 겸임하였다. 휘하에 좌수(座首) 1인, 별감(別監) 3인, 군관(軍官) 20인, 수첩군관(守堞軍官) 520인, 인사(人史) 30인, 지인(知印) 15인, 사령(使令) 5명, 군뢰(軍牢) 6명, 관노(官奴) 19명, 관비(官婢) 29명을 두었다. 공해(公廨)로 인화관(人禾舘)·무은당(霧隱堂)·향사당(鄕射堂)·장관청(將官廳)·군관청(軍官聽)·인리청(人吏聽) 등이 있었다.
1812년(순조 12)에는 가산산성에 별장(從九品)을 두고 가산진(架山鎭)을 설치하였다. 1640년부터 칠곡도호부 관아(官衙)가 험준(險峻)한 산정에 있게 된 후, 읍민들은 불편한 점이 많아 관아를 옮기기를 갈망하여 왔다. 1819년(순조 19)에 왕명에 의하여, 평지인 팔거구지(八莒舊地)[현 칠곡초등학교 자리]로 읍치를 옮기고, 이후로 가산산성 수성은 가산진의 별장이 담당하였다.
[형태]
가산산성 내성의 총 길이는 5.071㎞이며, 면적은 587,433㎡이다. 외성의 총 길이는 내성 축조 시 이미 만들어진 동문 좌우성벽 454m를 제외하고 4.669㎞이며, 면적은 1,509,289㎡이다. 중문 좌우의 중성 성벽은 0.422㎞이며, 내성을 동서로 가로막아 초축(初築)의 내성 남쪽 1/2을 중성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는데 중성만의 면적은 359,451㎡이다. 즉 동문과 중문의 좌우 연결 성벽을 포함한 가산산성 축성 총 길이는 11.041㎞이며, 동문·중문의 좌우 연결 성벽을 제외하고 내성·외성 모두를 합친 가산산성의 총 둘레는 10.164㎞가 되고, 성안 총 면적은 2,096,722㎡나 되는 광대한 산성이다.
동문은 외성 축조 이전까지 내성의 정문이었다. 개구부의 정면은 남동향을 향하고 있으며 입면 모양은 윗부분을 둥글게 한 홍예문(虹霓門) 형식으로써 개구부의 폭은 275㎝이다. 남문은 외성의 정문인 동시에 내·외성 전체의 정문이다. 1954년 집중 폭우로 가산산성 내 ‘남창’ 마을과 남문이 극심한 피해를 입어 유적의 대부분이 유실되었다. 이후 경상북도에서 1977~1980년에 남문루 및 남문과 암문·수구문·여장 185m를 복원·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1864년 제작된 가산진지도(架山鎭地圖)와 칠곡지도를 살펴보면 남문을 보호하기 위한 반원형 옹성(甕城)이 축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복원에서 옹성은 누락되어 원형을 잃고 있다.
남문의 개구부는 동문과 같은 홍예문으로 개구부의 폭은 341㎝, 바닥에서 홍예종석까지의 높이는 330㎝이다. 남문 육축부 상면에는 벽돌을 쌓은 여장을 설치하여 문루를 보호하였고, 그 좌우로는 성돌과 같은 석재를 이용하여 평여장을 시설하였다. 가산산성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북문은 1640년 내성 축조 시 설치되었다. 문의 형태는 평거식(平据式)으로 개구부의 규모는 폭 256㎝, 높이 180㎝이며, 천정은 장방형 판상석 8매를 결구(結構)하여 놓았다. 성문벽 외측으로 돌출된 방형의 적대 시설을 갖추고 있어 암문과는 구별이 된다. 서문은 가산산성의 제일 북쪽 돌출된 부분에 위치한다. 동문·북문과 같이 1640년 내성 축조 시 만들어졌으며, 북문과 마찬가지로 평거식 개구부를 하고 있다. 성문의 바깥쪽으로는 성벽에서 돌출 된 적대 시설이 있고, 성문 안쪽으로는 육축부를 보호한 옹벽이 마련되어 있다. 개구부의 형태는 북문과 같이 좌우로 1매의 장대석을 세우고 상면에는 판상 석재 7매를 결구하여 천장석을 하고 있다. 개구부의 폭은 260㎝, 높이 180㎝로 북문과 크기가 거의 같다. 서문의 상면에는 원형 주초석이 유존하고 있어 문루를 두었다고 추정된다. 중문은 내성의 중앙을 가로막아 내성의 1/2을 보호하기 위하여 1741년에 가산산성 중성 축조 시 만들어진 문이다. 1954년 대홍수 때 유실되었으나 1977~1980년에 1차로 복원·중수하였고, 1992년에 2차로 중문만을 다시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구부의 입면 상태는 홍예식으로 정면의 폭은 220㎝, 바닥에서 홍예종석까지 높이는 255㎝이다.
가산산성에는 많은 수의 암문(暗門)이 개설되어 있다. 암문은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 일반 성문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개구부를 내어 출입한 성문의 일종이다. 암문은 아측(我側)에 필요한 병기, 식량 등 항쟁물자를 운반하거나,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구원요청은 물론 원병(援兵)을 받고 역습을 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암문은 암문 내측에 옹벽 또는 흙을 쌓아 유사시 옹벽을 무너뜨리거나 흙으로 메워 암문이 폐쇄될 수 있게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암문의 개구부 형태는 전부 평거식이며 장대석을 결구하여 천장을 만들고 있다. 목재 문비를 설치하여 개폐하였다. 기존 사료에는 가산산성 성벽을 돌아가며 모두 11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표 조사에서 밝혀진 암문의 수는 모두 15개로 증축 시 4개 처가 더 추가된 것으로 판단된다.
가산산성은 일정공간이 성벽으로 둘러쳐져 있기 때문에 성내에서 발생되는 우수(雨水)를 비롯하여 제반 물 처리를 성벽 일부를 통하여 내보내고 있다. 성벽의 일부를 개구시켜 설치함에 따라 적절하게 배수가 되지 못할 경우 성벽 보존에 문제가 된다. 규모가 크고 문의 형상을 갖춘 경우 수문이라 하고 규모가 작은 경우 수구라 분류하지만 통칭하여 수구문이라 하기도 한다. 지표 조사 결과 4개소에서 수구문이 확인된다. 2개소는 1977년 복원되었고 다른 2개소는 유실되고 그 흔적만이 잔존할 뿐이다. 또한 가산산성 성안에는 천주사지, 보국사지 등의 사찰터와 장군의 지휘소인 장대지, 포를 걸었던 포루, 망루 등의 유지가 유존하고 있으며, 우물 9개소, 못 4개소와 비석 13기가 유존하고 있다.
『택리지(擇里志)』에 따르면, “一道無可以城守者, 惟漆谷邑治城郭 在萬作山上 截臨南北大路, 爲要害巨防”라 하여 “도내에는 가히 지킬만한 성이 없는데, 오직 칠곡부의 성곽만이 만길 높은 산위에 남북대로를 깎은 듯 서있어, 거대한 방어 요새이다.”라고 하여 가산산성의 위용과 온전함을 기록하고 있다.
[현황]
가산산성은 임진왜란의 치욕적인 국난을 극복한 다음에 국방에 대한 안보 의식이 고조되었을 시기에 국방 태세의 강화책으로 축성 되었다. 산성이 완성된 이후에 가산산성에서 왜적과 치루어 진 전투는 없었고 오히려 1950년 6·25전쟁 때 같은 민족끼리 ‘가산 741고지 전투’라는 현대식 전투가 이곳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어 축성 후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성벽이 무너지고 성내의 각종 건물과 민가는 불타 없어졌다. 더구나 1954년 7월 26일에 폭우와 산사태로 남문 성벽과 수구문이 붕괴되었으며 외성 안에 있던 남창마을[진남문 윗편, 약 50호 200명]이 매몰[35호, 24명 사망]되었으나 국군과 미군부대의 지원으로 남원 2리에 새마을[신흥, 신남창]로 이주하였다.
[전설]
가산산성 안에는 가산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다. 가산산성 북서쪽 성벽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바위 상면은 약 100여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사방을 훤하게 전망 할 수 있어 많은 등산객들이 이곳을 찾아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바위 상면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다. 신라시대의 승려였던 도선(道詵)이 산천을 다니다 바위를 둘러보니 땅의 기운이 너무 세어 이를 억누르기 위해 커다란 구멍에 철마(鐵馬)와 철우(鐵牛)를 넣었다고 한다. 1864년 제작된 「칠곡지도(漆谷地圖)」에는 가산바위 중앙에 큰 구멍을 그려놓고 ‘혈천심수십장(穴泉尋數十丈)’이라 하였으며, 『칠곡지(漆谷誌)』에는 ‘철우철마재가암혈중유속전신라승도선…(鐵牛鐵馬在架巖穴中有俗傳新羅僧道詵…)’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민속자료]
가산산성 남문 안에 있는 해원정사 산신각 옆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기와집이 있고 그 안에 관찰사 이세재 불망비(李世載 不忘碑)가 유존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남창마을 주민들 사이에는 불망비에 절을 하고 기원을 하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다. 정기적인 제사는 마을 주민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해원정사(解圓精舍) 주지스님의 주재 하에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오후 5시에 거행한다.
옛날 남원 2리 남창마을에는 10년마다 ‘빗신굿[별신굿]’을 거행하였으나 60여 년 전에 맥이 끊어져 그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또한 마을에서는 심한 가뭄이 오면 ‘무제[기우제]’를 올렸는데, 가산산성 안에 있는 북장대(北將臺)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제물은 생 돼지고기와 삼실, 술, 포를 준비하고 참석자 모두는 갈모[갈대로 만든 모자]와 두루마기를 입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가산산성은 1639년(인조 17) 내성의 축성을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 100여년의 긴 세월이 소요되었다. 17~18세기에 걸쳐 정상에 내성, 중턱에 중성, 하단에 외성을 쌓은 3중의 포곡식 석성으로써 금오산성, 천생산성과 더불어 영남 지방을 방비한 ‘영남 제1관방’의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