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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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兪伯曾 |
영어음역 | Yu Bakjeung |
이칭/별칭 | 자선(子先),취헌(翠軒),기평군(杞平君),충경(忠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성호 |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자선(子先), 호는 취헌(翠軒). 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역임한 유홍(兪泓)이며,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한 유대일(兪大逸)이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인 풍산군(豊山君) 이종린(李宗麟)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활동사항]
유백증은 1612년(광해군4) 진사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615년에 승문원부정자가 되고, 1621년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지평이 되고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조정랑, 사인, 응교를 거쳐 사간이 되었으며 당시 김신국(金藎國), 조성(趙誠) 등을 탄핵하였다. 1625년(인조3) 부응교로 있을 때 남이공(南以恭)이 김류(金瑬)의 힘을 믿고 불법을 자행한다고 논박하다가 이천현감(利川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이 파천한 강화로 찾아가 사도시정(司導寺正)이 되어 화의(和議)의 잘못을 상소했다. 1629년 나만갑(羅萬甲)의 당인(黨人)이라는 이유로 가평군수(加平郡守)로 좌천되었고 이어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으나 대신들의 안일함을 비난하다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밀려났으니 곧바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병조참지,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1636년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 화의를 주장한 윤방(尹昉), 김류(金瑬) 등의 처형을 상소하여 파직되었다.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대사성으로 기용되고 이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어 다시 윤방, 김류의 반성 없는 실정과 김경징(金慶懲), 이민구(李敏求)의 강화도 실패의 죄를 탄핵했다. 1638년 대사헌이 되어 다시 윤방이 종묘의 신주(神主)를 모독한 죄를 탄핵하고 국가자강책(國家自强策)에 대하여 10조(條)를 들어 상소했다. 이후 사직하여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3권 3책의 『취헌소차(翠軒疏箚)』가 있다.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 346번지[둔터로 88-21]에 1967년에 세운 부조묘(不祧廟) 충경사(忠景祠)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0호인 「유백증 초상」이 봉안되어 있다. 최석정(崔錫鼎)이 비문을 지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