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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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貴河 |
영어공식명칭 | Chae Guiha |
이칭/별칭 | 청일(淸一),다의당(多義堂),정의(貞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동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구본욱 |
출생지 | 후동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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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이주지 | 후동 -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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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단소 | 채귀하 묘소 - 황해도 평산군 궁위면 불곡 |
사당|배향지 | 서산서원 터 -
대구광역시 북구 검단로 234-32[검단동 1325]![]() |
사당|배향지 | 웅연서원 - 경상북도 상주시 |
성격 | 문관 |
성별 | 남성 |
본관 | 인천(仁川) |
대표 관직 | 호조전서 |
고려 후기 대구 출신의 문관.
채귀하(蔡貴河)[?~?]의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자는 청일(淸一), 호는 다의당(多義堂)이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채원길(蔡元吉)이고, 어머니는 개성고씨(開城高氏)이다.
채귀하(蔡貴河)는 대구 후동(後洞)[현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서 태어났다. 영천(永川)[현 경상북도 영천시]의 정몽주(鄭夢周)[1337~1392]와 교유하였으며, 둘 다 과거에 급제하여 함께 조정에서 관직을 수행하였다. 채귀하는 제학(提學)과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역임하고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이르렀다.
채귀하는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 등과 교유하였으며, 고려가 망하자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개성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이후 황해도 평산 다의현(多義峴)에 은거하다가 사망하였다.
채귀하의 저술로는 『다의당실기(多義堂實紀)』가 있다.
채귀하의 묘소는 북한 황해도 평산군 궁위면 불곡에 있다고 전한다. 신도비문은 형조판서 양천(陽川) 허전(許傳)이 지었다.
채귀하는 사망한 뒤 정의(貞義)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북구 검단동에 있었던 서산서원(西山書院)과 상주의 웅연서원(熊淵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