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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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瓊奎 |
영어공식명칭 | Cho Gyeonggyu |
이칭/별칭 | 화산(華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대구에서 활동한 정치가.
[개설]
조경규(趙瓊奎)[1904~1983]는 1904년 1월 6일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조성희(趙性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화산(華山),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삼촌이다. 1920년 대구의숙을 다니다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1931년 무렵 일본 교토제대 의학부 연구생으로 수업하였다. 귀국 후 대구 동산병원에서 근무하다 산부인과를 전문으로 하는 화산병원(華山病院)을 운영하였다.
[활동 사항]
조경규는 광복 이후 정치 활동을 벌였다. 대구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구지부에 가입하고 조직부장이 되었으며 그 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구지부 부위원장이 되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에 나섰으나 낙선하였다. 조경규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북도지부장, 대동청년단 경북도단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대동청년단 후보로 대구 갑구에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1950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북도지부장, 대한노총경북도연맹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50년 5월 10일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나가 대구 갑구에서 민의원으로 당선되고, 국회징계 자격위원장을 맡았다. 조경규는 1952년 국회에서는 내무치안위원장, 1953년 내무위원장을 지냈고, 국회 밖에서는 대한노총 부위원장, 대구에서 『시사신보(時事新報)』 사장, 대한정치학사원 이사장을 지냈다. 조경규는 1952년 무렵 자유당에 입당하여 중앙위원과 정책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조경규는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는 고향인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마하여 당선된 뒤 내무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최순주의 사퇴로 공석이 된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국회부의장 재임 기간은 1955년 3월 2일부터 1958년 5월 30일까지였다. 1958년 제4대 민의원선거에서도 경상남도 함안에서 자유당 후보에 나서 당선되었다. 조경규는 4·19혁명 이후에도 정치의 재개를 시도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61년 3·15부정선거 가담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하여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조경규는 이후에도 계속 자유당 소속으로 1963년 경상남도 함안·의령군 선거구에 출마하고, 1965년 서울 서대문구 을선거구의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7년에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계를 은퇴하고, 본업인 의료업에 종사하였다. 1970년 서울 백제의원 원장이 되었다.
조경규는 1983년 1월 13일 울산 동강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