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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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1928年 水利組合反對運動 |
영어공식명칭 | Opposition Movement on an Irrigation Association in 1928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손경희 |
일제강점기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 해안면에 설치할 수리조합 설립 반대 운동.
수리조합은 1906년 제정된 「수리조합 조례」에 따라 관개배수시설의 신설, 보수, 관리를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수리조합의 설치는 1920년대 일제의 농업정책인 산미증식계획의 원활한 성공을 위해 추진되었다. 일제는 자금보조 등 각종 지원으로 대지주의 수리조합 설치를 후원하였다. 대지주를 위주로 한 일제의 수리조합은 중·소자작농과 자소작농에게는 과다한 공사비와 수세(水稅)의 부담을 초래하였다. 또 소작농에게는 수리조합 구역 내 소작료 인상과 지주의 수세 및 공사비 전가로 부담을 가중시켰다. 그 결과 수리조합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1928년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일어난 수리조합반대운동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 이루어졌다.
해안수리조합은 1920년대 중후반 경상북도 달성군 해안면 검사동[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해안수리조합은 공사 시작 단계에서 면민 삼백 명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 반대 이유는 해안수리조합의 설계 때문이었다. 해안수리조합 설립으로 기존 논농사를 하던 동변동, 지묘동, 서변동, 연경동, 이곡동 등의 논을 이작(裏作)[벼를 베고 난 논에 가을보리나 채소 따위를 재배하는 일]하게 된다 하여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한편 이곳 지주 20여 명 역시 해안수리조합의 설치를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 뒤 1931년 2월 중순 조합장 서병주(徐炳柱)를 중심으로 창립되었다. 해안수리조합의 관개 혜택 면적은 약 4,958,678㎡[5백 정보]였다. 해안수리조합이 완성된 뒤에 조합 자리에 대구비행장 건설이 추진되면서 존폐 위기에 놓였다. 비행장 건설에 편입될 부지가 해안수리조합 전체 면적 991,736㎡[30만 평] 중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462,810㎡[14만 평]이었다.
해안수리조합 구역에 대구비행장이 건설되면서 수리조합의 관개 혜택 면적이 크게 줄어들어 수리조합으로서의 면모를 상실하였다.
해안면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안수리조합이 설립 운영되었으나 갈등과 분규 속에 존폐 위기를 맞기도 했다. 결국 일제는 수리조합을 통한 미곡 증산이라는 거대한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대구부[지금 대구광역시]를 포위하고 있는 농촌지대 달성군의 농업 생산에서 일제가 계획하고 있는 만큼의 식량 증산은 결코 쉬운 목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