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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일[동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0642
한자 徐相日[東區]
영어공식명칭 Seo Sangil
이칭/별칭 동암(東庵)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6년 7월 9일 - 서상일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7년 - 서상일 보성전문학교 입학
몰년 시기/일시 1962년 4월 18일 - 서상일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4년 4월 28일 - 서상일 조양회관 앞 기념 동상 제막식 거행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62년 - 서상일 중앙통일당사건으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선고
학교|수학지 서상일 수학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5가 1-2]
성격 독립운동가|정치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제헌국회 의원

[정의]

근대시기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소재의 조양회관 건축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정치가.

[개설]

서상일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동적인 삶의 궤적을 보여준 특징적인 인물이었다. 서상일의 삶의 궤적은 근현대 한국사회의 주객관적 조건에서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과정이었고, 한국 근현대사의 변동과 상호연관성을 맺고 있었다.

[가계]

서상일은 1886년 7월 9일 달성서씨 서봉기(徐鳳基)와 이영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서상일은 1909년 달성친목회, 교남교육회, 대동청년당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대구광역시 동구 대명동 안일암에서 ‘한일병합’과 함께 해산되었던 달성친목회를 재건하였으며, 강유원간친회(講遊園懇親會)[일명 재건달성친목회]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재건달성친목회는 이전 계몽운동적인 성격을 계승하였으며,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국권회복운동을 펼치고자 하였다. 1916년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벌어진 ‘대구권총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3·1운동 시기 민족자결주의, 파리강화회의 등에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주도하고, 독립청원서 전달에 간접적으로 개입하였다. 1920년 대구청년회에 가입한 후 1922년 7월에는 임시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문화주의에 주목하면서 조선 청년들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자아혁신’과 ‘자아독립’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청년회의 조직적 체계로 지방청년회, 지방연합회, 중앙연합 총회의 구성을 구상하였다.

1921년 조양회관 건립 추진에 참여하였다. 조양회관의 건물은 달성공원 앞에 약 357㎡[108평] 규모 토지를 확보하여 1922년 4월부터 중국인 청부업자에게 공사를 맡겨 7개월 공사 끝에 11월에 2층 적조 건물로 준공되었다. 현재 조양회관은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망우공원 안으로 이전되어 있다. 조양회관은 이후 1923년 7월 대구의 대표적 지주·자본가들이 결성한 대구구락부회관의 역할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대구구락부의 활동은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뒤 조양회관은 1926년에 추진된 조양동우회의 활동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조양동우회(朝陽同友會)의 설립 계기는 대구구락부의 “활동이 친목과 여흥으로 흐른다.”고 본 언론의 평가에서 보듯 대구구락부의 침체와 관련되었다. 그리하여 대구구락부를 대체할 단체로 조양동우회를 설립하고, 조양동우회를 ‘문화운동의 중추 기관’으로 설정하였다. 곧 조양동우회를 통해 문화운동의 중심세력을 형성하고, 또 문화운동의 중심기관으로 활용하려 하였던 것이다. 조양동우회의 설립 배경이 실천과 역행을 통한 생활창조의 초석을 쌓는 데 있다고 밝혔다. 그것은 조선의 사회 현실이 사선(死線)에 맞부딪혀 있어 생존운동이 필요하며, 그것을 위해 오직 투쟁이라는 실제 과업을 대중의 집단력으로 극복하자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조양회관에는 강당, 회의실, 도서실, 인쇄소, 탁구장, 사무실 등이 배치되었다. 조양회관의 마당에는 테니스장까지 만들어져 복합문화시설로 기능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인이 장악한 대구에 조선인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복합문화시설이 없었던 것을 고려할 때, 조양회관의 의미는 매우 컸다. 또한 당시 시민사회운동 단체들의 집회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신간회 대구지회의 설립이었다. 1923년 7월부터 동아일보 대구지국을 운영하였다.

서상일은 1921년 조선인산업대회에 참여한 것을 비롯하여 대구곡물신탁주식회사(大邱穀物信託株式會社)의 이사, 1922년 대구운송주식회사의 감사, 1924년 조양무진회사(朝陽無盡會社) 설립 참여, 1931년 대구산업금융주식회사에 출자, 1937년에는 경북상공주식회사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한국민주당의 8인 총무로 활동하면서 제헌국회 의원으로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1950년대 야당통합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진보당 활동을 벌인 이래로 혁신정당운동을 전개하였다. 4·19혁명 이후 치러진 7·29총선거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나서 대구 을구에서 민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1년 6월 통일사회당과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결성을 주도하다가 5·16군사정권에 의해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군사혁명재판소에 기소되어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저술 및 작품]

서상일은 1921년 6월 『신민공론』 2-6에 「조선청년회의 이상과 그 사업」, 1931년에는 『합법운동과 비합법운동에 대한 사견』을 저술하였다.

[묘소]

서상일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수유리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서상일은 대한민국정부로부터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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