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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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巖齋堂規 |
영어공식명칭 | Dokamjae Danggyu |
이칭/별칭 | 독암재당규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정의]
조선후기 학자인 최상룡이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있는 독암서당에서 학문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규칙.
[개설]
최상룡(崔象龍)[1786~1849]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자는 덕용(德容), 호는 봉촌(鳳村)이다. 최상룡은 달성(達城)의 강동(江洞)[현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출생했다. 최상룡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세상이 어지러워 분경(奔競)[엽관운동]이 심해짐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독암서당(讀巖書堂)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니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문전을 메웠다. 고을의 과거 한 사람의 명부를 보관하는 사마소(司馬所)를 중수하고 향약의 세부지침을 만들어 자치제도를 확립하고 마을의 풍속을 규정했다. 당시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유치명(柳致明)·김익동(金翊東) 등과 경전과 예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경전(經典)의 주요 내용을 도시(圖示)[그림이나 도표 따위로 그려 보임]하여 맥락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성리학과 훈고학을 깊이 연구해 「사서변의(四書辨疑)」·「재이록(在邇錄)」·「소학췌의(小學贅疑)」·「계몽차의(啓蒙箚疑)」·「정주서변의(程朱書辨疑)」 등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저서로는 『봉촌문집(鳳村文集)』 22권이 있다.
[제작 발급 경위]
「독암재당규」는 최상룡이 세속 선비들의 폐단을 바로 잡고 풍속을 교화시키기 위해 제정한 규칙이다.
[형태]
「독암재당규」는 서지문헌이다.
[구성/내용]
「독암재당규」는 규칙의 제정 이유와 절목 12조로 구성되어 있다. 「독암재당규」를 제정한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남의 부모를 욕하면 도리어 나의 부모에게 미치는 것이고, 사람의 선행을 욕하면 도리어 자신의 선행에 미치는 것이니 윤리를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 없다. 말하는 것은 떳떳하고 듣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자를 풍류인이라 하고, 이와 같지 않은 자를 우괴사(迂怪士)라고 한다. 이 서당은 공부하는 곳이고 여러 현자들은 독서하는 사람이다. 서당은 글로써 이름을 삼고 선비는 문(文)으로써 모이니, 우리 무리들은 이것을 깊이 경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먼저 더럽고 추악한 말을 하지 말고 다음으로 의관을 하지 않는 습관을 버리고 다음으로 사사로운 지혜를 행하지 않으면 좋지 않은 풍습은 거의 바로 잡아질 것이다. ”
이러한 이유를 바탕으로 절목(節目)을 치지(致知)·수행(修行)·처사(處事)·접물(接物)로 나누어 각각 세 개씩 세부지침을 편성하여 12조로 만들어 놓았다. 치지에서는 공부의 근본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설명하고, 수행에서는 학당에서의 몸가짐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처사에서는 생활태도에 관해 설명하고, 접물에서는 삶에서 경계하고 삼가야 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독암재당규」는 「백록동규(白鹿洞規)」에 의거해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 시절에 서원을 논의한 일을 적은 글을 참고해 작성하였다. 학문의 기초가 되는 사서(四書)의 구절을 통해서 당규 제정 이유와 절목을 제시하였다. 독암서당을 통해서 풍속을 교화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힘썼던 최상룡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