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3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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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聾淵書堂記 |
영어공식명칭 | Account of Nongyeonseoda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용천로 323[용수동 665-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11년 - 「농연서당기」이상정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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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81년 - 「농연서당기」이상정 사망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66년 - 「농연서당기」저술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02년 - 「농연서당기」간행 |
배경 지역 | 「농연서당기」 - 대구광역시 동구 용천로 323[용수동 665-2] |
성격 | 기(記) |
작가 | 이상정 |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인 이상정이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에 있는 농연서당을 대상으로 하여 지은 기문(記文).
[개설]
이상정(李象靖)[1711~1781]은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다. 1735년(영조 11)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39년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1740년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글의 대상이 된 농연서당은 원래 1640년(인조18)에 효종의 봉림대군 시절 사부인 최동집(崔東㠎)[1586~1661]이 인질이 된 봉림대군을 심양관(瀋陽館)으로 배종(陪從)하기로 하였는데, 미처 따르지 못하게 되자 이곳에 집을 짓고 은거하여 일생을 마친 곳이다. 후에 최동집의 후손인 백불암 최흥원(崔興遠)[1705~1786]이 이곳의 터를 닦아 작은 서당을 짓고 농연서당이라 명명하였다. 농연서당은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팔공산 용수천에서 북서쪽 건너편에 있는 숭정처사유허비(崇禎處士遺墟碑)[최동집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유허비] 옆에 있었는데, 1925년 홍수로 파손된 것을 1930년 현재 있는 곳으로 이건·중수하였다.
[구성]
「농연서당기」글의 서두에 농연서당이 위치한 곳의 주변 지세(地勢)의 세부적 특성과 농연서당이 건립된 과정과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농연서당을 중수하고 학문에 매진하려는 최흥원의 의도를 높이 평가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내용]
「농연서당기」의 내용이다.
팔공산의 농연(聾淵)이라는 곳은 물소리가 시끄러워서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여 ‘귀머거리 못’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농연의 북쪽 지세는 너르고 평탄하면서 깊고 그윽하여 정자를 지을 만한 곳이었다. 최동집(崔東㠎)이 명나라가 망하고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가자 농연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죽을 때까지 출사하지 않았다.
1754년(영조 30)에 최동집의 후손인 최흥원이 이곳의 터를 닦고 작은 집을 짓고 농연서당이라 하고, 자제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글을 읽고 학문에 전념하게 하고, 벗인 이상정에게 기문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특징]
「농연서당기」에서는 농연서당의 공간적 이미지를 글에 잘 녹여내었다.
[의의와 평가]
「농연서당기」는 옻골마을 경주최씨 집안의 학맥과 학문적 경향을 알 수 있고, 농연서당의 내력을 보다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