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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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村飛行場- 大邱空港- |
영어공식명칭 | From Dongchon Airfield to Daegu Airpor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지저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일수 |
[정의]
1937년부터 2018년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 일대에 건설된 비행장으로, 현재 군사비행장과 대구국제공항이 병행 운영되고 있는 비행장.
[동촌 대구비행장 건설]
1937년 1월 31일에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 일대에 대구비행장이 개장함으로써 대구광역시도 항공시대를 열게 되었다. 대구비행장 설치 움직임은 1930년에 최초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대구[대구광역시]에도 국제 항공로의 비행장이 설치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부터였다. 그 필요성 제기는 1931년 대구부가 추진한 도시계획, 특히 ‘대대구의 건설’을 목표로 한 도시계획이 추진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새롭게 추진된 도시계획은 크게 하나는 시구개정 곧, 대구 인근을 대구에 편입하는 시구개정 사업이고, 다른 하나는 대대구의 건설의 목표로 하는 사단 유치, 비행장 건설, 동촌을 대구에 편입 등이 주요 내용이 포함하는 계획이었다. 이에 대구에서는 비행장 건설을 위한 기성회가 결성되어 유치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아무런 활동 없이 지내다가 1933년 8월 8일 대구공회당에서 대구비행장 설치를 위한 기성회의 임시총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임원 선거가 진행되었다. 회장에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부회장에 한익동, 다나카[高田○吾] 등이 선정되었다. 그 뒤 1935년부터 비행장 설치 예산으로 17만원을 예상하고, 자금 확보에 나섰다. 동시에 비행장 위치 선정을 놓고 대구 인근의 원대동과 각축을 벌였으나 최종적으로 동촌이 선정되었다.
[해안수리조합의 농지 수용]
대구비행장 예정지로 선정된 동촌 일대는 대구 인근의 중요 농업지대였다. 그렇기에 농업에 종사하던 기존 농민들을 위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관련 농민 천여 명은 생계대책을 마련하라며, 대구부 당국에 수차례 진정하였다. 또한 대구비행장 예정지에는 1931년에 준공된 해안수리조합이 운영되고 있었다. 1920년대 중후반 경상북도 달성군 해안면 검사동 일대에 해안수리조합(解顔水利組合) 설립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해안수리조합은 공사 시작 단계에서 면민 3백 명이 반대하는 벽에 부딪혔다. 그 뒤 해안수리조합은 1931년 2월 중순 조합장 서병주(徐炳柱)를 중심으로 설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관개 혜택 면적은 약 5백 정보 규모였다. 해안수리조합의 경우 창립 과정에서 농민의 반대에 부딪히는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곳 지주 20여 명 역시 해안수리조합의 설치를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해안수리조합이 완성된 뒤에는 조합이 위치한 곳에 대구비행장 건설이 추진되면서 조합이 존폐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비행장 건설에 편입될 부지가 해안수리조합 전체 면적 992㎡[30만 평] 중에서 절반에 해당하는 463㎡[14만 평]이었다. 그에 따라 비행장이 건설되면 해안수리조합의 관개 혜택 면적이 크게 축소되어 수리조합으로서의 면모를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구비행장은 해안수리조합과 동 조합과 관련된 농지들이 대거 수용하여 건설되었다.
[동촌 대구비행장의 개장]
1935년 8월 무렵 대구비행장 설치가 거의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총경비 약 26만원에 463㎡[14만 평] 정도 부지로 건설하였다. 대구비행장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사전에 없던 격납고 시설을 갖추는 안이 추가되었다. 대구비행장 격납고 설치는 기존의 울산비행장에 타격을 입혔다. 곧 대구비행장의 격납고는 울산비행장의 격납고를 대체하는 방식이었다. 사실, 울산지역에서는 대구비행장 설치 단계에서부터 강렬한 반대 입장을 취했다. 대구비행장이 울산비행장의 기능을 대신할 것이라는 것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이었다. 또 대구비행장 건설과 함께 대구항공무전국 발신소 및 수신소의 건설도 추진되었다. 발신소는 동촌 아양교 부근에, 수신소는 수성면 범어동에 건설되었다. 그리고 대구비행장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만주로 향하는 항공우편도 취급하였다. 1939년 무렵 대구비행장의 전화통화구역도 확장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37년 1월 31일 달성군에서도 일본인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동촌에 대구비행장이 개장되게 되었다. 대구비행장은 조선 내 국제항공로의 주요 공항이 됨과 동시에 조선과 일본 그리고 만주를 연결하는 거점공항의 위치를 가졌다. 1937년부터 대구와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県] 고즈끼를 잇는 항공노선이 개설되어 매일 1회씩 60인승 규모 여객기가 왕복 운행하였다. 이 항공노선은 현해탄의 배편을 꺼려하거나, 시간을 단축하고자 하는 일본정치인이나, 경제인이 주로 이용하였는데, 대구에 착륙한 후 대구역을 통해 목적지로 향했다. 그런데 정작 대구 일반인들은 그러한 항공노선이 있다는 것 사실조차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다만 대구를 경유함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은 대구거주 일본인들에게 사기를 돋아주는 다시없는 자극제로 되었던 것 같다.
[K2 미공군비행장과 제11전투비행단]
해방 이후 동촌 대구비행장에는 제5공군 사령부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또한 대구에는 미 제8군사령부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한국전쟁 중 미 제5공군 사령부의 주요 임무는 38선 이북에 대한 폭격, 유엔군과 국군의 전선과 후방 빨치산 토벌작전에 대한 공중지원 작전이었다. 1950년 10월 미 제5공군 사령부는 미 제8군 사령부의 서울 이동에 뒤이어 서울로 이동하였다. 그 이유는 “전술공군사령부는 육군의 야전군사령부와 같은 곳에 위치하면서 상호 긴밀히 협조해야 한다.”는 공지 합동작전 교리에 따른 것이었다. 그에 따라 미 제5공군사령부는 미 제8군 사령부가 위치한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본부 길 건너편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건물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동촌 대구비행장에는 미 공군의 K2기지로 활용되었다. K2비행장은 현재에도 운영되고 있으면서, 동촌 대구비행장의 상징적인 명칭으로 기억되고 있다. 미 제5공군사령부가 서울로 이동되고 난 뒤에도 동촌 대구비행장의 K2기지는 미 공군의 한국 작전 수행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953년 2월 미 제5공군 부사령관 어너스트 K 워비톤 준장이 재임명을 받기 위해 귀국차 대구를 출발했다고 하는 기사도 확인된다.
1953년 3월 초 대구 공항에서는 한국공군 참모총장 최용덕(崔用德) 등 한국공군 수뇌부와 미극동공군사령관 웨이랜드 대장, 제5공군사령관 바커스 중장, 미 전공군참모총장 스파스 대장이 참석한 가운데 군사비밀회담이 개최되었다. 그 회담의 내용이 공개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으나 그 내용을 보면, 회담은 한국공군의 요청으로 열렸으며, 주요 의제는 한국공군의 획기적 증강을 위한 미국의 지원에 관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 1948년 4월 육군항공대 창설로 시작되는 공군 역사에서 1953년 7월 2일 미공군으로부터 인수한 F-51D전투기[일명 무스탕전투기] 10기가 대구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F-51D 무스탕전투기의 첫 출격이 이루어졌다. F-51D 무스탕전투기는 한국 비행장 조건과 환경에 적합하고 전투기 조작이 간편하며 전투시 공격력이 최대화 할 수 있었다. 한국 공군은 정전회담 때까지 F-51D전투기 133대를 보유하였다. 1955년 한국 공군 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F-86이 도입될 때 까지 한국공군의 주력기로 활용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이 전쟁이 끝나자 미 제5공군사령부는 1954년 9월 1일부로 일본 나고야로 이동했다.
1953년 겨울 대구 동촌비행장의 미군기지에는 미국의 유명 영화배우 마를린 먼로를 기다리는 미군 병사들로 가득 찼다. 점퍼 차림의 마를린 먼로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면서 점퍼를 벗어던지자 미군들의 환호는 극에 달했다. 당시 마를린 먼로는 미국의 유명 프로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와 결혼하여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먼로는 사람들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새 신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용기를 이용하여 동촌비행장에서 주한 미군 위문 공연을 펼쳤다.
동촌 대구비행장에는 한국전쟁 중 1.4후퇴를 계기로 공군본부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한국전쟁이 끝난 1955년 1월 9일부로 서울로 복귀 이전을 완료하였다. 1955년 11월 1일을 기해 대구비행장의 공군 기지에서 제5혼성비행단과 제7항로비행단 등 2개 비행단을 발단하였다. 이 2개 비행단은 같은 해 10월 15일 창설 완료된 것으로 2개 비행단 중 제5혼성비행단은 C146 수송기를 기간으로 하는 공수부대와 F-51D무스탕 전폭기 등으로 통합 편성되었다. 항로보안단은 레이다 기술의 운영과 통신 및 기상부문을 통합 편성한 것이다. 한편, 같은 날짜로 제10비행단은 제트비행단으로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1957년 공군에서는 제트 비행단으로 개편함에 따라 동촌비행기지를 확장하였다. 1959년 12월 대구 동촌비행장에서 공군 제2비행단격납고 상량식을 거행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항공기 수리 시설이며, 그간 대만이나 일본으로 보내 수리하던 한국 공군 전투기를 수리할 수 있는 시설이다.
1964년 6월 1일 공군의 동촌 대구기지에서는 제1훈련비행단을 제1전투비행단으로 승격시켜 우리나라 최초의 초음속전투기 F-5A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1969년 8월 29일 대구의 공군기지에 국내 최초로 F4D 팬텀기 1대 대대에 해당하는 6대가 미국으로부터 도입되었다. 그 비용은 1억 달러의 규모이며, 미국, 영국, 이란에 이어 세계 4번째 팬텀기 보유국이 되었다. 그 뒤 동촌 대구비행장에는 한국 공군 제11전투비행단이 운용되고 있다. 공군 제11전투비행단의 작전 전대로는 제102전투비행대대, 제110전투비행대대, 제122전투비행대대 등이 운영되고 있다.
[대구 동촌비행장의 민간공항 운영과 이전 추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강 이남의 주요 군사비행장, 민간항공 비행장으로 다각적으로 기능하였다. 1954년 동촌비행장의 일부를 민간공항으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때 대구와 서울 항로를 개설하게 되었다. 1959년 12월 중순 KNA에서는 국내선 1회선을 증가하여 대구-서울 간 정기 항공노선을 운항하였다. 이에 투입된 항공기는 쌍발기[DC-3]이며, 매일 왕복 운항하였다. 또 KNA에서는 대구 동촌비행장에 신설될 공군비행기 격납고의 상량식을 위해 동사 여객기 콘스텔레이션을 서울 여의도공항에서 출발하여 대구비행장까지 초항 비행을 하였다.
1964년 4월 부산비행장 대구출장소가 설치되고, 대구와 서울 간 국내선이 취항하였다. 1990년 한국공항공단 대구지사가 설립되었다. 1991년 정부는 동촌비행장을 국제공항화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동시에 군용기를 예천비행장으로 분산시키는 방안도 검토하였다. 1996년 대구공항에 국제선 정기노선이 취항하였다. 2001년 5월 대구공항 신청사 개관이 이루어졌다. 2002년 3월 한국공항공사 대구지사가 설립되었다.
대구의 동촌비행장이 운용된 이래 소음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대구비행장 인근 동구 주민 3,665명이 소음 피해를 호소하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에 2009년 7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는 피해가 인정된 3,374명에게 총 25억 5천만 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 뒤 2012년 7월 국방부가 소음대책 기준을 2010년 11월 대법원 판결을 적용해 개인주택은 80웨클 이상으로, 공공시설은 75웨클로, 공군비행장이 있는 대구·광주·수원의 개인 주택에 대해서는 85웨클 이상으로 명시했다. 이에 동구청과 동구 주민들은 ‘공항소음 방지 및 소음대책 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에서 규정한 소음대책지역 기준과 동일하게 75웨클 이상으로 낮출 것을 요구하였다.
2007년부터 공군비행장 이전 운동이 시작되어 2015년에 본격화되고 있다. 동남권의 김해국제공항의 포화상태에 따른 신공항의 필요성이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부터 제기되었다. 그 뒤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공약에 신공항을 포함시키면서 관심이 증폭되었다. 2008년 5월 대구를 방문하여 대운하와 신공항에 대해 언급하였고, 국토연구원의 제2차 타당성 연구 조사가 착수되고,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서 추진한 30대 광역 선도 프로젝트에 포함되었다. 이에 대구의 신공항 밀양 유치와 부산의 신공항 가덕도 유치를 둘러싼 두 도시의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대구의 신공항 밀양 유치는 오랜 숙원이었던 K2공군기지, 공항 소음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공항이전에 따른 개발 등이 가능하게 함에 따라 적극 유치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2011년 3월 국토해양부는 “두 후보지 모두 불리한 지형조건으로 인한 환경문제, 사업비 과다, 경제성 미흡 등으로 현시점에서 사업 추진 여건이 적합지 않다는 결론에 도출했다”며 백지화를 발표했다. 2016년 영남권 신공항 추진이 완전히 무산된 뒤 정부와 대구시는 대안으로 ‘K2공군기지와 대구공항 통합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2017년 대구시 동구의회에서 대구공항 통합이전추진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 동촌 대구비행장에는 대구공항, K2 미 공군기지, 공군 제11전투비행단, 공군군수사령부, 미군 미사일 탄약고 시설이 들어 서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구시민과 시민단체의 여론은 공론화 과정을 거쳐 공항 이전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