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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석의 유래」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143
한자 七星石- 由來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2가 30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석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1년 - 「칠성석의 유래」 국학자료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Ⅰ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09년 - 「칠성석의 유래」 대구광역시에서 발행한 『대구지명유래총람』에 수록
관련 지명 칠성석 -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2가 302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이태영|이의두
모티프 유형 지명유래담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2가에 있는 칠성석과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이야기.

[개설]

「칠성석의 유래」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2가에 있는 칠성석(七星石)과 관련하여 전하여 오는 암석 설화이자 지명유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칠성석의 유래」는 2001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한국구비문학』Ⅰ과 2009년 대구광역시에서 펴낸 『대구지명유래총람』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2가 302번지에는 칠성석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원래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일곱 개가 북두칠성(北斗七星)처럼 칠성동2가 일대에 흩어져 있어서 ‘칠성석[칠성바위]’이라고 하였다.

정조(正祖)[1752~1800] 때 경상도관찰사 이태영(李泰永)[1744~?]이 꿈에 대구읍성(大邱邑城) 북문 밖에 북두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 보니 큰 바위 일곱 개가 북두칠성처럼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태영은 제일 동쪽에 있는 바위에서부터 의갑(義甲), 의두(義斗), 의평(義平), 의승(義升), 의준(義準), 의장(義章), 의조(義肇)의 순으로 일곱 아들의 이름을 바위에 하나씩 새겼다. 일곱 아들은 장성하면서 성품이 각각 자기 이름을 새긴 바위를 닮아 갔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바위에 이름이 새긴 세 아들은 무관(武官)이 되었고, 동그스름하게 생긴 바위에 이름을 새긴 세 아들은 문관(文官)이 되었으며, 평범하게 생긴 바위에 이름을 새긴 아들 하나는 아무 벼슬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태영의 아들 이의두(李義斗)의 후손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선조의 기적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칠성바위 주변에 나무를 심고 가운데 ‘의북정(依北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그 뒤로 자식 없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부귀다남(富貴多男)을 빌었다고 한다. ‘칠성동(七星洞)’이라는 지명 또한 칠성석으로 인하여 붙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칠성석의 유래」는 암석 설화와 지명유래담을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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